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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좋아하시나요? 저는 유럽 프로축구 최강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즐겨 보는데요. 2017-18 시즌, 16강에서 강호 레알 마드리드와 파리 생제르맹이 맞붙었습니다. 레알의 홈경기였지만, 전반전은 시종일관 파리가 주도했습니다. 2년 연속 우승한 디펜딩 챔피언인 레알에 전혀 밀리지 않은 거죠. 파리가 먼저 레알의 골망을 흔들었지만 인저리 타임에 페널티킥을 허용했습니다. 호날두의 킥으로 1-1이 되자 후반전, 기세가 오른 레알이 다양한 공격을 시도하며 2골을 더 넣었습니다. 파리 생제르맹 선수들은 이렇게 완패로 질 줄 몰랐는지 충격이 오래갔습니다. 파리 홈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도 레알이 2-1로 쉽게 이겼는데요. 파리의 골대를 3번 맞힌 걸 생각하면 거의 일방적인 경기였습니다.
사실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 최고의 클럽이지만 이번 시즌은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라리가에서 바르셀로나와 항상 우승 다툼을 벌였지만, 올해는 약팀에게도 패하며 일찌감치 우승권에서 멀어졌죠. 레알을 이끄는 호날두는 오랜 기간 부진을 이어가며 팬들에게 원성까지 샀습니다. 반면, 올 시즌을 앞두고 파리 생제르맹은 완전히 다른 팀으로 거듭났습니다. 1970년 창단돼서 역사는 짧지만 프랑스 내에선 인기 클럽인데요, 더구나 2011년 카타르 투자청이 구단을 인수하면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막대한 투자로 프랑스 리그인 ‘리그 1’을 지배했지만, 유럽 대항전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 시즌을 앞두고 전대미문의 투자를 했는데요. 무려 2억2,200만 유로를 지급하고 세계 3대 선수로 손꼽히는 네이마르를 바르셀로나에서 데려왔고, 리그 1 라이벌인 모나코로부터 음바페를 영입하는 데 1억 4,500만 유로를 썼습니다. 세계 축구 역사상 1위, 2위의 계약이었습니다. 파리는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메시가 속한 바르셀로나와 연봉 총액이 비슷할 정도로 비싼 선수들이 많습니다. 구단주의 목적은 오로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었으니까요. 챔피언스 리그가 조별예선을 거처 16강 토너먼트로 들어가자 축구 전문가들은 파리 생제르맹을 맨시티, 바르셀로나와 함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았습니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는이 순위에 들어가지 못했죠. 그러던 파리가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파리 생제르맹은 자국 리그에서 독보적인 팀입니다. 프랑스의 리그 1은 스페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4대 리그보다 기량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손쉽게 리그에서 우승합니다. 어찌 보면 자국 리그에서 힘을 비축해서 주중에 벌어지는 챔피언스 리그에 쏟아부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게 그렇지 않습니다. 챔피언스 리그는 자국 리그에서 끝까지 경쟁하며 고생, 고생한 팀들이 오히려 우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1998-99 시즌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인데요. 전설적인 감독 퍼거슨이 이끄는 맨유는 트레블을 달성했습니다. 리그, FA컵, 챔피언스 리그를 모두 우승한 거죠. 리그에서는 마지막 날까지 아스날과 우승 경쟁을 해서 겨우 1점 차이로 이겼고요, FA컵에서도 아스날과 준결승전을 재경기까지 하며 체력을 소비했습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바이에른 뮌헨, 바르셀로나와 죽음의 조에 속해 예선부터 피 튀기는 싸움을 했습니다. 8강전부터 인터밀란,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을 물리쳐야 했고, 뮌헨과의 결승전에서도 지다가 가까스로 역전승을 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흔한 지 통계자료를 찾아봤습니다. 현재 시스템으로 챔피언스 리그가 재편된 1992-93 시즌 이후 자국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를 동시 우승한 14번 중 승점 10점 이상의 차이로 여유 있게 리그를 우승한 경우는 2번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 유럽 4대 리그에서 10점 이상 순탄하게 리그를 우승한 경우는 모두 32번이었는데요, 이 중에서 딱 2번만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고 모두 떨어졌습니다. 오히려 리그가 순탄하면 큰 무대에서 예상치 못한 고비를 만났을 때, 대부분 당황해서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국 리그에서 막판까지 피 터지게 경쟁하던 팀은 날카로운 긴장감을 유지해서 실수를 안 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긴장감이 어떤 역할을 하길래 이런 극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이노베이션 연구의 대가인 테레사 에머빌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스트레스와 창의성에 대해 대체로 비슷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는데요. 스트레스는 아이디어를 낼 때는 안 좋지만, 이걸 결과로 만들어낼 때는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시간 압박도 마찬가지고요. 아이디어 도출에는 해롭지만 성과를 낼 때는 이롭습니다. 기자들이 마감에 닥쳤을 때 엄청난 창의력이 생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거죠. 긴장감은 일의 종류에도 영향을 주는데요, 창의적인 일보다 논리적인 일을 할 때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요컨대, 아이디어와 창조 역량을 ‘쌓을 때는’ 스트레스보다는 자율성을 부여해야 하지만, 이 역량을 활용해서 성과로 ‘집결시킬 때는’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즉, 마지막까지 리그에서 체력과 집중력을 모두 소모해서 피로는 극에 달하지만,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챔피언스 리그와 같은 빅게임에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비결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파리 생제르맹 프로젝트의 중심인물인 네이마르가 리그에서 발목 부상을 당해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그는 파리로의 이적을 후회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다시 라리가로 돌아가거나 경쟁이 심한 프리미어 리그로 가길 바란다는 소식입니다. 부상 전까지 네이마르는 득점과 어시스트를 합한 공격 포인트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호날두처럼 골만 많이 넣는 게 아니라 메시처럼 게임을 읽으며 동료에게 기회도 잘 만들어줬다는 거죠. 하지만 그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자신의 기량이 떨어졌다는 걸 느낀 것 같습니다. 마치 그랜드슬램 결승에 올라온 테니스 선수들이 몸은 망신창이가 돼 있지만 경기 감각만은 최고조에 달하는, 그런 경험을 다시 하고 싶었을 겁니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픽사나 구글 같은 회사가 직원들이 자유롭게 일한다고 부러워하는데요, 여기 직원들, 창조의 마침표를 찍을 때는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일한다는 걸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