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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이병주입니다. 2014년 3월 2일 제86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에이즈에 걸린 존 우드루프를 연기한 매튜 맥커너히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20kg 넘게 감량해서 화제가 됐는데요. 체중 감량보다 돋보이는 건 그의 완벽한 연기였습니다. 언론에서는 이제 맥커너히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맥커네상스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죠. 연기파 배우가 즐비한 할리우드에서, 후보에 처음 올라 아카데미를 거머쥐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카데미와는 거리가 먼 배우였습니다. 1969년 텍사스에서 태어난 맥커너히는 광고 출연을 계기로 할리우드에 들어와서, 10년간 고만고만한 영화에 출연하며 경력을 이어나갔는데요. 그러다가 2001년 제니퍼 로페즈와 함께 찍은 <웨딩 플래너>가 흥행 대박을 터뜨리자, 헐리우드 제작자들은 이 남자 배우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미지는 로맨틱 코미디에 딱이었습니다. 금발의 곱슬머리, 눈썹을 오므리고 웃는 표정, 셔츠 단추를 풀면 나타나는 근육질 몸매는 여심을 녹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후 그는 <10일 안에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법>, <달콤한 백수와 사랑 만들기>, <헤어진 여자 친구들의 유령> 등을 히트시키며 로맨틱 코미디의 제왕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무렵 피플지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로 뽑힌 건 당연한 결과였죠. 그런데 당시 로맨틱 코미디는 대부분 여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영화였습니다. 맥커너히는 여주인공 심리 변화의 상대에 불과했죠. 연기랄 것도 없었습니다. 웃다가 화내다가 사랑스러운 표정 몇 번 지으면 끝이었으니까요.
그런데요, 2009년 <헤어진 여자친구들의 유령>이 히트하자, 오히려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고 결심하고 빗발치는 출연 제의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성공의 최정상에서 이런 결정을 한다는 게 대단한데요. 아무래도 맥커너히는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텍사스의 한 카우보이는 과녁에 대고 총을 쏘는 게 아니라 벽에 무작위로 총을 쏘고 총알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에 과녁을 그려 넣는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명사수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우연한 성공에 그럴듯한 필연적 이유를 갖다 붙일 때 이런 오류를 많이 범하게 됩니다. 사실은 운으로 성공했는데, 적성이나 자기만의 노력 때문이라고 여기는 거죠. 매커너히는 이런 역할로 한 성공이 운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더 이상 이미지가 소모되기 전에 벗어나기로 한 거죠. 사실 로맨틱코미디를 고수하다가 갑자기 인기가 시들해진 배우들은 많습니다. 맥 라이언이 대표적인데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할 수 있는 역할이 작아졌지만, 과거의 성공을 잊지 못해서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매커너히의 이런 결심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의 경험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 성공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더 강화되기 마련이니까요. 인지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네 이서 교수가 이를 잘 보여줬습니다. 1986년 챌린저호 폭파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학생들에게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32개월이 지나 이 학생들을 불러서 똑같이 물어봤습니다. 7%의 학생들만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기억이 왜곡돼 있었고, 25%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억은 이처럼 왜곡되기도 하는데요, 이 실험의 핵심은 그다음입니다. 네 이서 교수는 다르게 답한 학생들에게 2년 반 전의 설문지를 건네줬습니다. 놀라운 건 자기가 완전히 다른 내용을 썼다는 걸 알았는데도, 왜곡된 기억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제 글씨체가 맞긴 하는데, 제가 진짜로 이렇게 답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아아, 어쨌든 이번에 답한 게 확실합니다.” 이렇게 말이죠. 이 연구의 핵심은 기억이 바뀐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바뀐 기억, 스스로 만들어낸 기억에 대해 확신을 갖는 존재라는 겁니다. 성공의 기억일수록 더합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데 무수히 쓰이면서 과거 성공의 경험은 더욱 강화되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는 인간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란 얘깁니다. 그런데 맥커너히는 어떻게 이런 성공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요? <웨딩 플래너>로 인기를 얻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그는 대본 연구를 심하게 합니다. 뉴욕타임스 기자가 인터뷰하러 갔을 때 질문에 대한 답변자료를 한 움큼 가져왔는데요, 더 놀라운 건 그 많은 자료에 쪽지를 빼곡히 붙여놓고 인터뷰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맨틱코미디 주인공을 맡았을 때도 대본을 수백 번 읽고, 캐릭터의 특징에 대해 수백 페이지의 노트를 만듭니다. 이것들을 계속 분석하고 자문자답하면서 인물을 나타낼 수 있는 몇 개의 표현으로 추려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의 근육과 미소에 대해서만 얘기했습니다. 자신의 인기에 대해, 그 성공에 대해 ‘이게 지속될까?’ 의심과 위기의식이 들었던 것이죠. 그는 에이전트에게 모든 로맨틱 코미디 대본을 거절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영화계에 소문이 퍼져서 1년 반 이상 아무 대본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2년간 공백기를 갖게 됐습니다. 결국 저예산 영화부터 차차 출연하기 시작했는데, 연기력으로 주목 받게 된 것은 금방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헐리우드에서 캐릭터가 고정되지 않고 어떤 역할도 해내는 배우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과거의 성공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GE의 이멜트 회장도 “모든 제조업체는 소프트웨어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제조업으로 성공했던 방식을 털어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학습도 중요하지만 가지고 있는 걸 털어버리는 폐기 학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