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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2월 8일 뉴욕, 미국 3대 발레단 중 하나인 조프리 발레단은 매우 이례적인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발레는 클래식 음악에 바탕을 둔 우아한 예술이었는데요. 이날 “Surfing USA”로 유명한 비치 보이스의 경쾌한 팝 음악, “2인승 쿠페”를 활용한 발레가 상연됐습니다. 현대무용을 접목한 안무에, 시티 센터에 온 사람들은 색다른 즐거움을 맛보았고,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발레 분야에서 최초로 시도된 크로스오버 공연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만들어낸 안무가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트와일라 타프입니다. 1941년 인디애나주 포틀랜드의 농장에서 태어난 타프는 어려서부터 발레, 탭댄스, 현대무용과 함께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드럼 등의 악기를 배웠고, 그림, 웅변, 독일어, 프랑스어를 익혔습니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타프는 4학년 때부터 다시 무용을 시작했는데요. 1965년 자신의 회사를 세워서 Tank Dive라는 공연을 성공시킨 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타프는 클래식에 재즈, 팝, 록음악 등을 융합한 크로스오버 공연을 개척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각기 다른 개성을 조화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1985년 영화 <백야>의 안무를 맡았을 때도 그랬는데요,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작은 스텝으로 우아한 춤을 추었고, 탭댄서인 그레고리 하인즈는 다이내믹한 턴을 돌며 신나게 춤을 추었습니다. 서로 너무 달랐지만 타프는 둘 다 잘할 수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서, 발레와 탭댄스가 접목된 우아하면서도 다이내믹한 안무를 고안했습니다.
타프가 대단한 건요, 이런 획기적인 공연을 평생 만들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1965년 이래 매년 두서너 작품씩 창작해서, 지금까지 140여 개의 신작 레퍼토리를 공연으로 선보였습니다. 50년 이상 활동하다 보니, 당연히 상도 많이 받았는데요. 연극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150개가 넘는 상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출산한 기간을 포함해서 한 해도 쉬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어떤 예술가들은 왕성한 창조의 시기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창조력이 회오리처럼 몰아쳐서 인생의 위대한 걸작을 남기고 고흐처럼 죽기도 하고 절필하거나 은퇴하기도 합니다. 타프는 이런 방식은 창의성을 유지하는 데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강력한 불꽃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불씨가 창조의 원동력이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평생 창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타프는 새벽 5시 반에 연습실에 가는 택시를 타는 게 자신의 창작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택시를 타는 행위를 일종의 의식이라고까지 표현했는데요. 그 이유는 매일 아침 똑같이 하다 보니 습관이 되었고, 이제는 이 일을 건너뛰거나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외국 공연을 가거나 심지어 가족과 여행을 가더라도 연습할 장소를 물색하고 새벽 5시 반에 어김없이 택시를 탄다는 겁니다. 연습실에 가서 매일 똑같은 동작으로 몸을 풀고 나면 여러 가지 새로운 안무가 떠오른다는 거죠. 타프에게 창조는 기계적인 규칙과 습관에서 나옵니다.
사실 타프처럼 장수하는 창작가들은 대부분 비슷한 말을 하는데요. 일흔의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훈 소설가는 작업실 책상에 필일오(必日五)라고 써 붙여놓고, 하루 원고지 5장은 반드시 쓰는 걸 규칙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직장을 관두고 홀로 글쓰기를 하면서 규율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거죠. 김훈보다 한 살 아래의 무라 카키 하루키는 더한데요. 하루에 원고지 20매씩 쓰는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게, 노년에도 두꺼운 소설을 꾸준히 펴내는 비결입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에서 멈추고, 잘 안 써지는 날은 어떻게 해서든 20매를 채운다는 겁니다. 그래야 20매 규칙이 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최초로 남극을 정복한 아문센도 비슷한 규칙을 실천했는데요, 지형과 날씨에 상관없이 무조건 하루 28km를 주파했습니다. 맑은 날은 반나절에 쉬고, 궂은날은 밤까지 걸리더라도 말이죠. 며칠만 달리는 게 아니라 수개월 여정을 견뎌야 하는 입장에서, 잘 될 때 무리해서 달리고 안될 때 쉬면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러면 한동안은 성취의 기간도 있지만 슬럼프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장수하는 예술가들이 일정한 규칙을 정해놓고 그걸 지키는 이유도 창조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함입니다. 타프 역시 착상이 마구마구 떠오를 때도 무리하지 않고 퇴근한다고 하는데요, 다음날 연습실에 오면 그 착상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거죠. 번뜩이는 영감이 떠오른다고 무리해서 밤을 새우고 이후 며칠 동안 멍하니 있는 것보다, 그 영감을 매일 일정하게 유지하는 편이 더 현명한 것입니다.
트와일라 타프의 홈페이지 경력 난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녀는 오늘도 계속 창조한다.(Today, Ms. Tharp continues to create.)” 여든을 바라보고 있는 2017년 가을에도 타프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는데요, 밥 딜런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심지어 이번에는 직접 무대에 올라 동료 무용수들과 춤을 춰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요즘 어느 기업이나 창조와 혁신이 절실합니다. 그런데 창조와 혁신을 번뜩이는 영감의 산물이라고 여기거나 특별한 천재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분들께 타프는 말합니다. 창조는 습관이라고. 그것은 오랜 성실함에서 나오는 시간의 산물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