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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호찌민이 사랑받는 이유

biumgonggan 2021. 8. 24. 11:04

최근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묘소에 들렀는데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평일인데도 참배객들이 1km도 넘게 줄을 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호찌민이 사망한 지 5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지도자이자 매우 창조적인 전략가였습니다. 월맹군을 맡은 지압 장군과 함께 기상천외한 방법을 고안해 강대국을 물리친 인물이었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대규모 기습으로 프랑스를 물러가게 했던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압 장군과 기획했고요, 게릴라 전쟁을 고안해서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구정공세를 감행해서 베트남 전쟁의 판세를 일거에 뒤집었습니다. 그는 매우 신중했지만 필요할 땐 과감하게 결단하는 승부사였습니다. 1945년 프랑스, 일본, 중국 등 열강이 베트남을 호시탐탐 노리던 상황에서 일본이 물러나는 걸 보고 재빠르게 전국적으로 봉기를 일으켜서 2주 만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이 기회를 놓쳤다면 베트남은 열강들의 손아귀 속에 그대로 들어갔을 겁니다. 호찌민은 항불 시위로 퇴학을 당한 후, 21살이 되던 1911년 해외로 나가서 전 세계 수십 개국을 돌아다니며 베트남 독립운동을 하다가 3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독립동맹, 즉 월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항불 독립투쟁을 펼칩니다.

 

그는 정책 판단에서도 매우 유연하고 창의적이었는데요, 철천지원수였던 프랑스와 협상을 맺은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잠시 프랑스를 대신해서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했는데요, 일본이 패망하자 연합국은 베트남 북부를 중국군이, 남부를 영국군이 점령하다가 프랑스에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이때 호찌민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베트남을 침략했던 중국이 더 무서운 존재라고 판단한 것이죠. 그래서 프랑스와 협상을 맺고 철수했던 프랑스 군대를 다시 베트남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이 결정은 강경파뿐만 아니라 대다수 부하들이 반대했습니다. 수십 년간 베트남 국민을 수탈했던 증오의 대상인 프랑스군을 두 팔 벌려 불러들인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호찌민은 이불변 응만변, 즉 ‘하나의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수없이 변하는 세상에 대응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되 상황에 따라 대응방식은 변해야만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민족 독립이라는 불변의 지향점을 위해서 어떤 일도 감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호찌민을 두고 공산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 말이 많은데, 사실 호찌민이 공산주의를 택한 건 레닌이 유일하게 제3세계 식민지의 독립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호찌민의 전략적 유연성과 창의성은 하나의 원칙과 목표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뇌과학자들은 5천억 개의 뇌세포는 목표라는 명령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 전두엽 외측에 창의력을 담당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를 활성화하려면 목표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저명한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도 우리 뇌를 창의적으로 만드는 몰입의 첫 번째 조건으로 명확한 목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빈치, 톨스토이, 베토벤, 아인슈타인 등 위대한 창조가들이 테크니션이 아니라 철학자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나 봅니다. 또 아마존, 테슬라 등 창조와 혁신에 앞서가는 기업들이 모두 핵심가치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비즈니스의 상황 변화에 따라 모든 걸 바꿀 수 있지만 그러한 변화의 중심을 잡는 게 바로 업의 본질과 목적인 것이죠. 조직에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불변의 원칙과 변화무쌍한 전략을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해야 하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리더 자신이 그 원칙을 몸소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도 불변의 원칙을 스스로 체화해서 각자가 직면한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호찌민은 베트남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평생 사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있으면 사욕이 생긴다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요, 형과 누나의 장례식에도 나랏일이 바빠서 못 간다는 편지 한 장 보내고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석궁 옆에 있는 정원사의 집에서 기거했는데요, 국민들이 고생하는데 호화롭게 살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지요. 또 반찬이 세 개를 넘으면 요리사에게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평생 남긴 유품이 옷 한 벌과 모자, 신발, 지팡이, 아령 등 아주 소박했는데요, 죽을 때까지 주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사적인 권력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권위를 배격했습니다. 옷은 항상 서민들과 같은 옷을 입었고요, 생전에 자신의 박물관이나 동상을 짓는 것을 금지했고, 평전을 쓰는 것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는 1969년 9월 2일 베트남 독립기념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종전을 끝내 보지 못했기에 그의 유언장에는 전쟁이 끝났을 때의 민생 대책과 전사들에 대한 예우가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사적인 내용은 죽은 후에 장례를 치르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서 그 재를 세 상자로 나누어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호찌민은 민족의 독립이라는 불변의 가치를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앞에 말씀드렸던 프랑스와 협상했을 때 국민들도 반대하고 화를 냈는데요, 호찌민이 시민들 앞에 나가서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온 자신을 믿어달라고 진심 어린 연설을 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그를 지지했습니다. 진정성을 믿었던 것이지요. 베트남은 참 젊고 활기차더군요. 마치 우리 80-90년대처럼 초고속성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호찌민이 불변의 가치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만 호찌민이 강조했던 가치 즉 불변의 지향점은 공유하고 있었으니까요. 오늘날 변화가 엄청나게 빠릅니다. 그러나 변화에만 치중하다 보면 자칫 방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변화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뭔가를 시도한다면 왜 이걸 하는지 확실히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