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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There Will Be Blood>가 나왔을 때였습니다. 영국의 유명 잡지 텔레그래프는 주연을 맡은 배우에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꺼냈는데요, 바로 각본을 완성한 후 영화의 크랭크인이 2년 넘게 지연되었는데도 별일 없었냐는 것이었죠. 어떻게 출연 약속을 지킬 수 있었냐는 짓궂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전혀 의외의 대답을 합니다. “아니요. 정말 좋았습니다. 오히려 그게 축복이었어요. 한 인물에 대해서, 그의 삶에 대해서 충분히 조사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요. 몇 년간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3번 받은 유일한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입니다.
당시 데이 루이스는 이 영화에서 대립하는 역할을 했던 상대 배우를 그만두게 만듭니다. 촬영 초기, 상대는 그에게 위협을 느껴서 도저히 못하겠다며 포기한 것입니다. 촬영장 밖에서도 적대적인 눈빛으로 그를 대했기 때문이죠. 흔히 로버트 드니로, 잭 니콜슨, 알 파치노, 말론 브란도 등 메소드 연기, 즉 인물의 삶에 실제로 몰입하며 연기하는 이런 배우들도 대부분 그 사람만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알 파치노는 어떤 영화에 나와도 알 파치 노고, 로버트 드니로는 그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주며 인물을 연기합니다. 하지만 영화 평론가들은 데이 루이스는 스타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출연하는 영화의 인물에 100% 동화되어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출연한 여러 영화의 스틸 화면을 연속으로 보면 도저히 같은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데이 루이스에게 첫 번째 아카데미상을 안긴 영화는 1989년에 만들어진 <나의 왼발>인데요, 왼발 하나만 쓰는 뇌성마비 화가의 일생을 다룬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 출연을 결정한 후 그는 더블린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뇌성마비 환자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고요. 영화 촬영이 시작된 후부터는 주인공과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했을 뿐만 아니라, 출퇴근할 때도 스태프들이 그를 차에 실어서 집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밥도 아내와 스태프들이 떠먹였다고 하니까, 진짜로 그 인물로 살았던 것입니다. <라스트 모히칸>을 찍을 때는 인디언에 의해 길러진 백인 역할을 위해, 실제로 숲 속에서 살면서 사냥과 낚시로 끼니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영화 장면에는 나오지도 않지만 카누 만드는 법을 직접 익혔고 동물 가죽을 벗기는 법도 배웠습니다. 영화 촬영이 없을 때도 항상 화승총을 휴대하고 다녔는데요, 크리스마스 파티에까지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2002년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도살자 빌 역할을 맡았는데요, 실제 런던의 도축업자를 고용해서 동물을 도살하는 법을 익혔고, 서커스단에서 사람을 구해서 칼 던지는 법을 배웠답니다. 너무 과로한 탓인지 영화 촬영에 들어갔을 때 데이 루이스의 몸 상태가 점차 나빠져서, 급기야는 폐렴에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따뜻한 코트를 입지 않고 낡은 모직 코트를 고집했는데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세기 중반 뉴욕에서 그런 옷을 구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게 이유였습니다. 결국 병원 치료를 받아야만 했죠. 이 영화에 같이 출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훗날 데이 루이스로부터 끔찍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털어놨습니다. 미치광이 도살자 역을 맡은 그가 쉬는 시간에도 칼을 갈며 자신을 계속 노려봐서 ‘진짜로 나를 싫어하는 거 아냐’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데이 루이스가, 맡는 배역마다 어디에도 없는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른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 훨씬 창의적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적 사고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해온 루트번스타인 교수는 창의력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생각도구를 체계화했는데요, 그중에서도 감정이입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창조가 어려운 이유는 색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레 자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고민하는 대상 어느 것에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 속으로 들어가 문제의 일부가 되면 그것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데이 루이스 역시 도살자 빌에 빠져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 시대, 그 상황을 놓고 평가할 때 그는 정말 악질이기만 했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답니다. 그래서 악당이지만 관객들이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입체적인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기업들은 저마다 어디에도 없는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기 위해 고민합니다.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새로운 방법을 써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데이 루이스의 말처럼 내 자신을 벗어던지고 진짜 ‘고객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고객의 몸과 마음으로 제품을 바라보면 새로운 통찰과 직관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저명한 산업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는 20대의 나이에 노인 분장을 하고 1979년부터 3년간 미국 도시 100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노인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죠.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직접 체험해보니 통찰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용하기 편리한 바퀴 달린 여행가방, 양손잡이용 가위, 고무손잡이가 두툼한 주방용품 등 혁신적인 제품들을 내놓았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이야기처럼 나라는 틀을 벗어나서 고객이 되어 생각하고 느끼는 게 창조와 혁신의 출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