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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하시모토의 슬로리딩

biumgonggan 2021. 8. 23. 10:12

일본도 대학입시 경쟁이 매우 치열한데요, 1968년 대학입시 결과가 나왔을 때입니다.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베시의 한 사립학교가 도쿄대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다니는 중고일 관교인 나다 고등학교였습니다. 언론의 관심이 된 나다 중고등학교에 취재가 들어갔고요. 도쿄대를 비롯한 명문대 입학의 성공 비결이 밝혀지자 일본 사회는 더 크게 놀랐습니다. 바로 입시 기적을 만든 하시모토 다케시라는 한 국어교사 때문이었는데요. 그는 책 한 권을 6년 동안 읽고 또 반복해서 배우는 희한한 수업방식을 활용해 왔습니다. 그는 중학생들은 꽤 읽기 어려운 나카 간스케의 <은수저>라는 소설을 선택해서, 그야말로 잘근잘근 씹어서 통독하고 완독 했습니다.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한 시간에 한 페이지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는데요, 모든 문장을 천천히 읽고 여기 나오는 한자나 단어를 조사해서 익힙니다. 그리고 각각의 문장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스스로 제목을 달아봅니다. 일정 분량이 지나면 챕터별로 내용을 정리하고요,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나 문장은 설명과 함께 암기합니다. 또 책에 나오는 어려운 단어를 이용하여 문장을 만드는 연습을 하기도 하고, 감동받은 내용이나 책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토론하고 짧은 글을 써보기도 합니다.

 

에도 시대 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에 일본 전통풍습이 자주 나오는데요, 이런 게 나오면 야외에 나가서 직접 그걸 해봤습니다. 이렇게 하면 6년 동안 책 한 권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수업이 가능한 건 나다학교가 교사에게 100% 자율권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학년 정원이 200여명밖에 되지 않는 나다 학교는 아이들이 입학했을 때 교과 담당교사 한 사람이 정해지면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이 아이들만 가르치는 제도를 채택했습니다. 그러니까 교사는 6년에 한번씩 신입생을 받게 되는 꼴이지요. 그리고 수업에 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건 교사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학교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책임을 지라는 건데요. 1934년 이 학교에 부임한 하시모토는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연히 나카 간스케의 소설에 빠진 하시모토는 그의 소설을 몇 번씩 읽은 후에, 그의 책 한 권이면 국어의 모든 걸 다 가르칠 수 있겠다고 확신했습니다. 몇 년을 준비해서 1950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은수저’ 수업을 이끌어 왔습니다. 그의 수업방식이 각광을 받자, 일본에서 ‘슬로 리딩’이라는 책 읽기 방법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의 수업은 소설책 한 권을 읽어가면서 수많은 샛길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그의 수업을 듣고 도쿄대 입시를 본 아이들은 “도쿄대의 국어 문제쯤은 누어서 떡먹기였다”는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하시모토에게 은수저 수업을 들은 수많은 제자들은 하마다 준이치 전 도쿄대 총장처럼 현재 일본에서 정관계, 학계, 문화예술계의 지도층이 되었습니다. 키스 소여 같은 심리학자는 하시모토의 수업에 대해 이런 설명을 할 것 같습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준비와 휴식 단계를 거쳐 점화된다고 말입니다. 정보와 지식을 흡수하거나 몰입하는 준비단계를 지났다고 아이디어가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산책을 하거나 환경을 바꾸는 등 휴식단계를 거쳐야만 한다는 거지요. 머릿속에서 정보들이 숙성되고 정리되어 서로 연결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책을 느리게 읽거나 반복해서 읽으면, 아이디어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이 휴식단계를 충분히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자주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책을 매우 느리게 읽었는데요, 보통 다른 사람보다 4-5배는 느리게 읽었습니다. 글을 쓰고 책 쓰는 일을 하게 되자 느린 독서 속도가 아무래도 정해진 시간에 정보 수집을 많이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보가 적더라도 그 이면에 있는 핵심을 파악하려고 애썼고, 책을 한 권 읽더라도, 저는 보통 일주일 이상 걸리는데요, 여러 가지 생각을 최대한 많이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뭔가 새로운 걸 창조해 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워낙 경영환경이빨리 변하고 새로운 기술도 너무너무 많습니다. 핀테크가 뜬다고 하면 저기 들어가서 빨리 돈을 벌어야 하는데, 라는 조바심이 납니다. 요즘 인공지능이 뜨니까 딥러닝이나 빅데이터 기법을 도입해서 마케팅이나 경영을 한 단계 레벨 업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걸 빨리빨리 도입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독창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낸 기업은 대부분 오랫동안 해당 분야에서 내공을 쌓은 기업이니까요.하시모토의 슬로 리딩, 즉 느리게 읽기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오랫동안 생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줍니다. 이건 독서백편의자현이라고, 옛 성현들이 배우던 방법이었습니다. 옛 선비들은 하나의 책을 백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고 하며 이를 실천했습니다. 열 권의 책을 읽기보다는 좋은 책을 열 번 읽으란 거지요. 이는 오히려 현대사회에 더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감에 대해 읊었던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이 1934년 발표한 시 바위의 한 구절입니다. “정보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지식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범람하는 정보 속을 헤매다 보면 결국 참된 지식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또 수많은 지식을 접하려다가 정작 소중한 지혜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넘치는 지금의 비즈니스 환경에서 핵심이 되는 본질을 간파하는 지혜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