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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1997년 IBM의 슈퍼컴퓨터 딥 블루가 체스 세계 챔피언 카스파로프를 이긴 이래로 거의 20년 만이네요.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는 바둑에서조차 기계가 사람을 이겼습니다. 이번 대결은 우리 사회에 인공지능에 대한 담론을 촉발시켰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요. 특히 창의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경기에서도 드러났듯이, 기계가 잘하는 게 있고 사람이 잘하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이 이렇게 발전하게 된 건, 초창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쓰기 때문입니다. 마빈 민스키 같은 천재들은 컴퓨터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규칙을 프로그래밍하는 방법으로 인공지능을 만들었습니다. 체스나 바둑의 규칙을 입력해서 두게 하는 방법이지요. 그런데 세상이 워낙 복잡하니까 이런 방법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인공지능의 발전이 지지부진하다가 컴퓨터 산업이 발달하면서,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점차 바뀌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데이터를 입력해서 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학습해서 판단하게 만든 것이죠. 이게 바로 머신러닝, 혹은 딥러닝 방식입니다. 체스나 바둑의 기보를 모두 입력하는 것이죠. 워낙 저장된 데이터가 많다 보니 게임을 할 때 유사한 모양이 나오면 승률을 곧바로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연역적인 방법에서 귀납적인 방법으로 바뀐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만능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 않습니다. 인공지능도 잘 못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데이터에 없는 걸 판단하는 겁니다. 즉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걸 잘 못합니다. 이번 대결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났습니다. 알파고는 수비적이더군요. 백을 둘 때 훨씬 더 잘 뒀습니다. 단조로운 상태에서는 거의 승리합니다. 치밀해서 지역 싸움에서는 백전백승입니다. 즉 빈 공간에 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공격에 대응하는 걸 훨씬 더 잘합니다. 이게 확률 계산이 편하니까 당연합니다. 2국에서 이세돌 9단은 이창호 9단처럼 꼼꼼하고 안정적으로 뒀습니다. 해설자들이 형세가 유리한 것 같다고 했지만 결국 패했습니다. 안정적인 상태의 바둑으로는 계산의 달인인 알파고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4국에서 이세돌은 허를 찌르는 묘수를 냈습니다. 창의적인 수에 알파고는 그 의미를 몰라서 실수를 연발해냈습니다. 인간이 1,202대의 컴퓨터를 이긴 겁니다.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알파고는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걸 잘하고, 이세돌은 새로운 것, 혁신에 더 능합니다. 평균적으로는 안정적인 기계가 이길 확률이 높습니다.
허나 아주 가끔, 세상을 바꾸는 건 혁신입니다. 대부분 실패하지만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알파고의 상대로는 이세돌이 아주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전라남도의 비금도에서 태어난 이세돌은 12살에 프로에 입단한 이래,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기사가 되었습니다. 이창호가 마치 인공지능처럼 안정적인 계산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스타일이라면, 이세돌은 전문가도 예측할 수 없는 묘수와 상식을 벗어난 새로운 전략으로 상대를 뒤흔드는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공격적이어서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있습니다. 이세돌은 늘 새로운 방식을 고민했고 틀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무려 85집을 잃다가도 마지막에 역전하는 짜릿한 승부를 자주 연출했지요. 이런 자유분방하고 도전적인 스타일로 인해 바둑계에서는 문제아로 찍히기도 했습니다. 그가 바둑계를 휩쓸 때가 3단이었는데요, 더 높은 단을 달기 위해 치러야 하는 승단대회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존 제도에 정면으로 대항한 것이죠.
결국 한국기원이 한발 물러서서 세계대회 우승, 준우승에 따라 승단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2009년에는 바둑리그에 출전하지 않고 중국에서 활동하겠다고 해서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수습되었지만 이세돌의 바둑은 그의 성격을 꼭 닮은 것 같습니다. 이번 대결에서도 4국을 이긴 후에, 5국은 흑으로 이겨보겠다며 흑을 잡았습니다. 알파고가 백이 유리하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험과 도전을 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적인 이세돌에게 한국 바둑계의 미래가 걱정스러운 모양입니다. 이세돌은 몇 년 전부터 한국바둑의 위기설을 제기했습니다. 바둑 도장들의 틀에 박힌 교육이 한국바둑의 창의력을 죽인다고 말입니다. 바둑도 마치 입시처럼 빠른 성과를 내기 위해 주입식 교육이 널리 퍼져있다는 겁니다. 이런 교육이 지속되면 점차 한국바둑의 특징이 없어질 거라며 걱정했습니다. 예전에는 다양한 기풍의 기사들이 많았는데, '이렇게 둬야 맞아, 저렇게 두는 건 틀려'라고 가르치면 모든 사람들의 기풍이 비슷해질 거란 얘기지요. 이세돌의 이런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2013년에는 한국 바둑이 세계대회를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요, 비공식적으로 집계하는 세계랭킹에서도 대부분 중국 선수들이 장악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판단능력까지 추월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공지능에 의해 훨씬 일찍 점령당한 체스계가 실마리를 주고 있습니다.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를 이긴 후, 체스계는 인간과 컴퓨터가 한 팀을 이뤄서 커다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백지에 전략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담당하고, 전술적인 싸움은 컴퓨터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더니 엄청난 성과를 내더란 겁니다. 인공지능이 가진 파워, 그리고 잠재력은 대단합니다. 정확함과 신속성은 인간이 따라갈 수 없지요. 하지만 인공지능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틀 안에서 학습하는 기계일 뿐이죠. 기계는 틀에서 벗어난 창조적인 생각은 할 수가 없습니다. 향후 가까운 미래에 많은 일자리들이 기계로 대체되는 시대가 오더라도 오히려 인간의 창의성은 더욱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