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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 뉴욕 양키즈의 유격수 데릭 지터는 야구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야구는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종목이다. 야구를 하기 위해 키가 2m가 돼야 할 필요도 없고, 100m를 12초에 뛰어야 할 필요도 없다" 지터의 말대로 열심히만 한다면 키가 작아도, 다리가 느려도 야구는 충분히 다른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습니다. 지터는 야구를 잘하기 위한 비결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죠. "You don’t have to have talent for effort" 노력하는 데 재능은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지터는 어떤 상황에서든 1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선수로 잘 알려져 있죠. 그런데 지터의 인터뷰는 여러 선수들이 함께 하는 경기라는 야구의 특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선수 개개인의 특출한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죠. 현역 시절 오랫동안 주장을 맡았던 이숭용 해설위원은 "야구는 '희생'을 공식 기록으로 남기는 경기"라고 말합니다. 다른 종목은, 도움은 기록으로 남겨도, 희생을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습니다. "팀 동료들을 내 앞에 세우는 희생을 통해 팀 동료들 곁에 나란히 설 수 있게 된다" 메이저리그의 명포수 요기 베라의 말처럼, 실제로 철학적 의미에서 '희생'이라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버리고, 그로써 한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는 행위로 정의됩니다.
야구에는 정말 여러 가지 형태의 희생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형태의 희생, 희생번트와 희생플라이가 있죠. 둘 모두 앞에 '희생'이라는 단어가 붙고, 공식 기록에 남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 둘 뿐만이 아닙니다. 2013 시즌 넥센이 많이 썼던 작전인데요. 주자가 자신을 스스로 '미끼'로 만드는 희생이 있습니다. 주자 만루에서 2루 주자가 리드 폭을 길게 가져가면서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2루에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3루 주자가 홈을 파고드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작전을 통해 넥센은 LG를 중요한 경기에서 이기기도 했습니다. 이때 2루 주자는 스스로의 아웃을 각오하고 미끼가 되는 희생을 하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반드시 출루가 필요한 순간,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몸 쪽 공을 피하지 않고 1루에 나가는 것도 희생의 한 종류이고요. 일명 '패전처리 투수'라 불리는 이들의 투구도 야구에서 가장 의미 있는 희생 중 하납니다. 패전처리 투수란 점수 차이가 많이 난 상태로 뒤진 경기에서 나머지 이닝을 혼자서 막아내는 투수를 뜻합니다. 이미 경기를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내일 열리는, 이길 수 있는 경기에서 다른 투수들이 던질 수 있도록 패전 처리 투수는 혼자서 묵묵히 공을 던지면서 다른 투수들이 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가끔 일어나는 보복행위 또한 마찬가집니다. 우리 팀 타자가 상대의 위협구에 당했을 경우 그대로 갚아주기 위해 보복성 빈볼을 던지는데요. 이럴 경우, 빈볼을 던지는 투수는 퇴장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지요.
이렇게 야구에서 등장하는 많은 희생 플레이들은 단순히, 개인이 집단을 향해 순종하고 복종하는 차원을 넘어선다는 데 그 매력이 있습니다. 물론 희생 플레이를 통해 득점을 생산하고 승리를 손에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이해와 신뢰, 그리고 소통의 문제가 숨어있습니다. 희생 플레이가 득점과 승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희생이 가치가 있다는 이해와 신뢰가 반드시 합의되어야 합니다. 그 합의를 위해서 조직 내부의 소통이 원활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요. 예를 들어주자가 1루에 있는 상황에서 대는 희생번트는 자신의 뒤를 잇는 다음 타자, 또 그다음 타자가 안타를 쳐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게 해서 득점이 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뤄낸 희생의 가치가 뚝 떨어집니다. 주자 3루 상황에서 벌어지는 수 사이드 스퀴즈, 이른바 자살 스퀴즈는 더욱더 높은 수준의 상호 신뢰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3루 주자가 무조건 뛰고, 타자는 반드시 번트를 대는 작전이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실수를 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주자가 뛰었는데 타자가 번트를 대지 못하면 바로 아웃이 되고, 득점 기회가 모두 날아가 버리죠.
앞서 설명한 패전 처리 투수 또한 다른 투수들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 충분한 휴식을 얻고 다음 날, 혹은 미래의 경기에서 호투를 해 팀에 승리를 안겨줄 거라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합니다. 아시다시피 희생은 개인의 목표보다 집단과 조직의 목표를 우선시할 때 이뤄집니다. 야구와 일반 기업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생에 있어서는 그 희생이 자발적인 것이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하는 비자발적인 것이냐에 따라 결과의 의미와 가치가 전혀 달라집니다. 감독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진 희생,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희생은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선수 스스로, 자발적으로 '아, 지금은 번트를 대야 하는 상황이구나!'하고 인식한 뒤 이뤄지는 플레이만이 가치가 있고 실제 성공확률도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발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바로 팀원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그리고 소통을 통해 팀원 모두 그 믿음을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다음 타자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번트는 그 의미가 사라지게 되고, 주자가 스스로 미끼가 되는 희생 플레이 또한 3루 주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자발적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감독이 시켜서 하는 희생은 오히려 팀의 조직력을 깨뜨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자꾸 번트만 대야 하는 선수는, 선수로서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단순히 한 타석뿐 아니라 미래의 성장 가능성 전체를 담보로 내놓아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희생을 자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직 내부의 이해와 신뢰, 소통이 필수적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누구나 서로를 위해 희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일반 기업, 조직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희생은 상호 신뢰, 지금의 희생이 조직원의 성장, 조직 자체의 발전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조직, 누구나 번트를 댈 준비가 돼 있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