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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두산 연습생, 김현수의 성공

biumgonggan 2021. 8. 8. 21:10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별명은 ‘화수분’인데요. 화수분은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 설화 속의 단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두산에는 뛰어난 선수들이 계속해서 배출된다는 뜻에서 ‘화수분 야구’라는 말을 별명으로 얻었는데요. 두산 화수분 야구의 대표 격에 해당하는 선수가 바로 김현수 선수입니다. 2008년과 2009년에 타율이 무려 ‘3할 5푼 7리’였는데요. ‘3할 5푼 7리’로 2008년에는 데뷔 3년 만에 타격왕에도 올랐습니다. 특히 그 해 베이징 올림픽에 나가서 일본의 왼손 투수 이와세 선수를 상대로 대타로 나와 안타를 때렸던 장면도 굉장히 인상 깊게 남아 있는데요. 김현수 선수는 명실상부 리그 최고 타자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사실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지 못할 뻔했습니다. 김현수 선수가 신일고 3학년 때인 2005년이었는데요.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 대표선수였습니다. 당시 대회 기간 중에 이듬해인 2006년, 프로야구에서 뛰게 될 신인 선수들을 뽑는 드래프트가 열렸는데요. 김현수 선수는 대표팀 선수이기도 했으니까 내심 상위 라운드에 지명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드래프트 이전에 프로야구 롯데로부터 롯데가 김현수 선수를 뽑을 수도 있다는 귀띔을 받기도 했거든요. 당시 신인 드래프트를 할 때 실황 중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문자중계만 하던 시절이어서 당시 청소년 대표선수들이 모두 PC방에 모여서 드래프트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롯데가 3라운드 지명에서 김현수 대신 김문호 선수를 선택합니다. 김현수와 김문호는 똑같이 외야수 왼손타자였거든요. 결국 김현수 선수의 이름은 8개 구단 아무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김현수 선수는 숙소로 돌아와서 방에 누워있었다고 해요.

 

당시 대표 선수 중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선수가 겨우 2명이었는데, 김현수 선수와 지금 SK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는 김광현 투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광현 선수는 2학년이었거든요. 따라서 드래프트 대상이 아니었고, 결국 김현수 선수 혼자만 전체 청소년대표선수 중에 지명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죠. 김현수 선수에 따르면 그때 숙소 방에 누워서 본 천장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원래 롯데가 김현수 선수를 지명하려고 했던 건 맞습니다. 김문호가 먼저 다른 팀에서 지명 된 이후에 김현수 선수를 지명할 거라는 계획이었지요. 그런데 앞선 팀들이 김문호를 지명하지 않아서 김문호가 남게 되자, 롯데가 김문호를 지명하게 되었거든요. 포지션이 겹치는 바람에 김현수 선수는 결국 3라운드는커녕 8라운드, 9라운드가 지나서도 지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김현수 선수는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못한 상태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되지 못할 위기에 빠집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결정과 우연한 사건들이 겹치게 됩니다. 뒤늦게 김현수 선수가 일종의 FA상태가 되니까 롯데와 LG, 두산이 김현수 선수를 지명대상자가 아닌 신고선수, 연습생으로 데려가기 위해 러브콜을 합니다. 롯데는 김현수 선수에게 계약금을 준다고 했고요. LG 출신의 신일고 정삼흠 감독은 김현수 선수에게 LG행을 권합니다. 그리고 김현수 선수는 두산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선택이 되는데요. 롯데에는 자신과 포지션, 타격 방향, 스타일이 겹치는 김문호 선수가 이미 드래프트가 되어 있었고, LG에는 당시 쟁쟁한 외야수들, 지금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병규, 박용택 등 왼손 외야수들이 넘쳐났습니다. 당장의 내일 보다는 미래가 중요한 상황에서 김현수 선수는 2~3년 안에 주전을 노려볼 수 있는 두산을 선택하게 됩니다. 신고선수, 연습생은 계약금도,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김현수 선수는 물론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했지만 훈련량이 곧장 1군 무대의 승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많은 선수들이 신고선수로 입단한 지 1년 만에 구단에서 방출되기 마련입니다. 지난 시즌 신인왕을 차지했던 넥센의 서건창 선수도 LG에 신고선수로 입단한 지 1년 만에 방출됐습니다.

 

여기서 운명적인 우연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김현수 선수는 2006시즌을 2군에서 보낸 뒤, 그해 가을 일본 미야자키에서 열리는 교육리그라는 곳에 참가하게 됩니다. 일종의 신입사원 연수 같은 겁니다. 그리고 해당 구단의 감독들이 신입사원들이 교육을 받는 교육리그를 직접 참관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해 두산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합니다. 두산은 승률 5할 1푼 2리를 기록하고도 KIA에 1경기 차이로 뒤지면서 5위에 그쳤거든요. 그 전 해인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두산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2006년과 2011년 딱 두 번 뿐이었습니다. 2006년에 가을야구를 안 하다 보니 김경문 감독이 마땅히 할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신입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교육리그를 한 번 가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김현수 선수가 감독의 눈에 띄었던 거죠. 만약 두산이 2006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더라면 미래의 간판타자가 될 김현수 선수의 발탁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우연이 기회를 가져다주지만,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성공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김경문 감독은 이듬해인 2007년, 김현수 선수를 개막전 엔트리에 넣습니다. 1차전과 2차전에는 경기에 나설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현수 선수가 ‘아, 이제 2군에 내려가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3차전에 갑자기 3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하게 됩니다. 물론 기회를 잡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김현수 선수도 첫 번째 타석, 두 번째 타석에서 모두 내야 땅볼을 때리게 되는데요. 바로 그 2번째 타석에서 또 내야 땅볼을 때린 뒤 풀이 죽어 있을 때, 김경문 감독이 조용히 김현수 선수를 더그아웃 뒤로 불러냅니다. 김현수 선수는 당시 정말 크게 혼나는 줄 알았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은 전혀 혼을 내지 않았습니다. 김경문 감독은 김현수의 두 손을 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괜찮다. 안 뺄게. 자신 있게 쳐라” 김현수 선수는 결국 3번째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내는데요. 그것도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적시타로 타점까지 기록합니다. 기회를 결과로 만들어내는 것은 노력과 함께 그 노력의 결실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와 격려입니다. 이후 김현수는 팀의 중심 타자로 자리 잡기 시작하고요. 자신의 첫 시즌에서 2할 7푼 3리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해 가을 두산은 한화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됩니다. 큰 경기 경험이 없는 김현수 선수를 두산 김경문 감독은 1차전부터 2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시킵니다. 1차전에서는 2타수 무안타 삼진 1개에 그쳤지만, 김현수는 2차전에서 4타수 3안타와 함께 자신의 데뷔 첫 포스트시즌 홈런까지 때립니다. 신고선수였던 김현수가, 연습생이었던 김현수가 명실상부한 두산의 중심타자가 되는 장면입니다. 김현수의 성장에는 여러 가지 운 좋은 일들이 동시에 작용한 것 같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피나는 노력이 감춰져 있습니다. 김현수는 2006 시즌 2군에서 스윙 스피드를 늘리기 위해 매일 1000개 이상의 스윙을 했습니다. 타자에게 공을 가볍게 던져주는 훈련을 토스 배팅이라고 하는데요. 김현수는 자신의 배를 향해 아주 빠르게 던져주는 공을 때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 공을 방망이로 때리지 못하면 배에 바로 맞게 됩니다. 그 빠른 공을 때려내면서 김현수의 스윙이 좋아진 거죠.

 

두산의 '화수분 야구'는 자원의 효율적 관리에서 나옵니다. 선수 관리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당장의 수요와 니즈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3~4년 뒤에 생길 수요를 미리 예측하고 움직입니다. 반대로 몇몇 하위권들의 구단은 내야수가 부족하면 당장 내야수를 뽑고, 투수가 부족하다 싶으면 당장 이번 드래프트에서 투수를 뽑습니다. 야구단의 선수 또한 일종의 자원이고 리소스이기 때문에, 그 자원이 언제 어떤 부분이 부족해질 시점을 미리 예측해서 움직이는 것이죠. 그래서 3~4년 뒤에 팀에 필요할 포지션의 선수를 미리 선택하고, 성장시키고, 혹은 필요할 시점에 맞추기 위해서 미리 군대에 보내게 됩니다. 매년 부족한 포지션을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것, 그래서 '화수분 야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3~4년 뒤를 내다보는 팀 운영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수 선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2005년에는 전상열, 김창희 등 두산의 주전 외야수들이 어느 정도 노쇠화가 된 상황이었고, 구단은 그 부분을 3~4년 뒤에 채울 선택과 운영을 했어야 됐거든요. 두산의 '화수분 야구'는 3~4년 뒤를 미리 예측하고 운영하는 데서 나오는 거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