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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신적 지주이자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에 줄곧 제동을 건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 퇴위 의사를 밝혔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후 살아있는 왕의 양위가 단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혔는데요.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아시아 각국의 상처를 보듬는데 평생을 헌신해온 그가 퇴위한다면 과거사 문제와 남중국해 분쟁 등으로 격랑에 휩싸인 동북아 정세에도 큰 파장이 있을 전망입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그의 퇴위와 복잡한 후계구도가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보겠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은 1933년 히로히토 일왕의 2남 5녀 중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태평양전쟁의 주범은 도조 히데키 원수지만 이를 허가한 히로히토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일본은 그가 네 살 때 중일전쟁, 여덟 살 때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그의 유년시절 기억은 방공호 대피로 점철됐습니다. 그는 패전 후 5년간 미군이 보낸 여성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에게 미국식 교육을 받았는데요. 이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자아비판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새해 첫날 신년 목표를 서예로 쓰는 일을 '가키 하지메(書始め)‘라고 하는데요. 패전 다음 해인 1946년 그가 쓴 문구는 바로 평화국가 건설이었습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일본 패전을 경험한 그가 아버지 시대의 과오를 뉘우치고 평화를 강조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인 거죠. 결혼도 남달랐는데요. 오로지 왕족과 결혼했던 선대 왕들과 달리 그는 1959년 제분회사 상속녀 쇼다 미치코와 결혼합니다. 미치코 왕비는 평민 출신이란 이유로 왕실의 냉대와 무시에 시달렸지만 둘은 행복한 가정을 꾸렸죠. 부모의 영향 때문인지 둘 사이의 2남 1녀도 모두 평민과 결혼했습니다.
1989년 부친 히로히토가 영욕으로 점철된 생을 마감하자 그는 일본 역사상 두 번째로 고령인 56세에 즉위합니다. 아키히토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는데요. 그는 1991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방문을 시작으로 중국 사이판 싱가포르 팔라우 하와이 등 일본이 공격한 아시아 각국을 속속 방문합니다. 특히 현지에 있는 일본인 병사 위령비뿐 아니라 상대국 위령비에도 동시에 참배했죠.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고,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강한 결의가 담긴 행위입니다. 야스쿠니 신사를 여덟 번이나 방문한 부친과 달리 일본 우익들의 직간접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런 행보는 아베 총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요. 2015년 8월 15일 종전 70주년 발언을 보면 두 사람의 과거사 인식이 얼마나 다른 지 알 수 있습니다. 아베 총리는 “전쟁과 관계가 없는 젊은 세대에게 사죄를 계속하게 할 순 없다”라고 한 것과 달리 일왕은 “과거사를 깊이 반성한다”라고 했죠. 양측은 일왕의 팔라우 방문, 나루히토 왕세자의 한국 방문 등을 두고도 사사건건 대립했는데요. 일왕은 총리가 바뀌면 사저에서 총리 부부에게 환영 만찬을 베푸는 전통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아베를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일왕은 한국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1990년 일본을 찾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과거사 문제를 사과하며 ‘통석(痛惜)의 염(念)’이란 표현을 썼고 2001년 “일본 고대서 속 일본기에 간무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 후손이라고 기록돼있다. 한국과의 강한 인연을 느낀다”고도했는데요. 일본 주류 역사학자들이 미는 소위 황국사관, 즉 하늘에서 일왕이 내려와 일본에서 자생했다는 것을 정면 부정한 발언이라 큰 화제가 됐죠. 2005년 사이판의 한국인 위령비에 참배했고 2007년엔 도쿄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려다 숨진 고 이수현 씨를 소재로 한 영화도 관람했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는 왕실 후계문제와도 직결돼있는데요. 일본 왕실은 남성 승계만 허용하고 있는데 부친과 평화주의 성향이 비슷한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는 외동딸만 두고 있죠. 반면 원래 존재감이 미미했던 차남 후미히토 왕자는 2006년 아들 히사히토를 낳았는데요. 후미히토는 이 아들을 등에 업고 왕실 문제에 강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후미히토 왕자는 전립선암, 협심증 등으로 부친의 건강이 나빠지자 ‘일왕 정년론’까지 주장했죠. 얼핏 보면 효심 섞인 발언이지만 결국 자신과 아들이 빨리 왕위에 오르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일부 우익들은 “일왕이 숨지면 나루히토 왕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지 말고 곧바로 후미히토 왕자가 계승하는 게 옳다”고까지 주장합니다.
결국 아키히토 일왕의 양위로 일본 사회의 대대적 변화는 불가피할 전망인데요. 2016년 7월 10월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아베 정권이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금지한 평화헌법 개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당장은 아베 지지파 사이에서도 개헌 반대 의견이 많아 이를 급히 추진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지만 줄곧 아베의 우경화를 저지해온 아키히토 일왕마저 없다면 우경화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은 자명합니다. ‘살아있는 일본의 양심’ 아키히토 일왕이 없는 일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아시아 각국이 그의 양위 의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