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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에서는 게임의 규칙이 바뀐다는 주장을 자주 듣게 됩니다. 과거와는 다른 룰로 경쟁해야 하고 기존의 강점이 오히려 약점으로 바뀐다고요. 물론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룰이 다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바뀌는 룰이 있고 바뀌지 않는 룰이 있습니다. 바꿀 것은 바꿔야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000년 닷컴 버블 붕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3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고 신기술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많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신경제"라는 용어를 제시하며,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죠. 신경제는 수확 체감의 법칙이 사라지는 “멋진 신세계”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밀레니엄을 맞이한 세계에 사상 유래 없는 버블 붕괴가 닥쳤습니다. 대폭락의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죠. 에드거 앨런 포우의 소설 <소용돌이 속에서>에는 고래조차도 휩쓸리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노르웨이 해안의 소용돌이 “마엘스트롬"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적적으로 이곳을 빠져나온 한 선원이, 소용돌이의 내부를 들려줍니다. 오늘의 주인공 벤 호로위츠는 버블 붕괴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온 또 한 사람의 목격자입니다.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가 벤 호로위츠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뒤 IT 업계에 뛰어듭니다. 넷스케이프에 참여하기도 한 그는 클라우드 관련 스타트업을 키워 휴렛패커드에 16억 달러에 매각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벤처 캐피탈을 운영하면서 자본만이 아니라 경험에 기반한 조언을 스타트업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호로위츠가 <라우드클라우드>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한 것은 1999년이었습니다. 회사의 앞날은 장밋빛이었죠. 그러나 2000년 4월 닷컴 버블이 붕괴했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IT 기업의 주가가 폭락하며 5,000을 돌파했던 나스닥 지수가 1200으로 떨어졌죠. 투자자가 실종되고 자금이 고갈되자 호로위츠는 궁여지책으로 기업 공개를 단행하지만 주가는 폭락합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스타트업의 IPO란 천정부지의 주가 상승과 억만장자가 된 주주들의 잔치였는데 말입니다. 호로위츠는 결국 회사의 메인 사업부를 매각하고 소프트웨어만을 남긴 <옵스웨어>라는 회사로 사명까지 바꿉니다. <옵스웨어>는 주가가 30센트로 떨어져 상장폐지 단계까지 몰리죠.
호로위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즈니스의 핵심은 큰 꿈을 갖는 게 아니라, 그 꿈이 악몽이 되었을 때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 허둥대며 해답을 찾는 일이다.” 그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긴장 속에서 소화불량,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도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문자 그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그의 악전고투 중에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옵스웨와의 최대 고객인 EDS가 거래를 끊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은 호로위츠는 상황을 돌이키려고 동분서주합니다. 어느 날 EDS의 실력자가 회의를 하러 오던 중 경유지에서 최대한 오래 머물러 있는 항공편을 예약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 실력자는 업무 스트레스가 심해, 공항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죠. 호로위츠는 그의 성향을 알아차립니다. 스트레스에 지쳐 복잡한 것, 변화를 거부하는 스타일이란 걸 말입니다.
좀 더 캐본 결과 EDS는 일반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탱그램이라는 회사에서 공급받고 있었는데, 이를 타사 제품으로 교체하자는 의견이 사내에서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기존 시스템에 익숙한 이 실력자는 이런 상황이 질색이었죠. 호로위츠는 그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그는 옵스웨어와의 계약을 유지하면, 탱그램의 모든 제품과 업그레이드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호로위츠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즉각 탱그램을 인수했던 것입니다. 우연히 전해 들은 자질구레한 정보가 문제 해결로 직결된 것이죠. 오늘 없는 해결책이 내일 나타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호로위츠는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냈습니다. 버블 붕괴는 “신경제”가 약속하던 유토피아의 환상을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수확체증의 낙원은 하루아침에 지옥 같은 생존 경쟁의 장이 되었습니다. 떠나는 고객을 붙잡고 투자자를 설득하고 매출과 주가를 유지하는 모든 노력은 과거와 똑같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경제는 구경제와 다를 바가 없었죠. 어찌 보면 예전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진 측면도 있습니다. 호로위츠는 자신의 생존 비결이 직원에게 진실을 말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종업원과의 신뢰는 과거 장기 고용 시절과는 다른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해고와 같은 나쁜 소식을 호로위츠는 항상, 직접 직원들에게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언젠간 다시 만날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려고 비겁하게 모습을 감춘다면 믿을 수 없는 경영자로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고용관계가 한시적이 된 만큼, 평판은 더욱더 중요한 자산이 되는 것이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또한 그대로이지만, 생존의 의미가 한 층 더 심화됩니다. 호로위츠는, 스타트업은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난파선의 침몰을 막기 위해 배의 짐을 버릴 때에도 결코 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죠. 그것은 혁신입니다. 스타트업은 세상에 새로운 것을 전하기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호로위츠는 메인 사업부를 매각하고 종업원을 해고하면서도 핵심 기술과 인력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조차 포기하고 연명하는 스타트업은 천천히 죽어가는 것으로 호로위츠는 이를 ‘벤처 연옥'이라고 부릅니다. 비전과 아이디어를 지키다가 실패한 앙트 러프 러너는 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옥에 빠진 기업가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모든 산업혁명은 거대한 버블 붕괴를 예외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물결은 이를 이겨내고 한 차원 높은 번영의 시대로 상승했죠. 그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자세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헤쳐 나온 용기 있는 소수가 불씨를 지켜온 것입니다. 닷컴 버블을 극복한 스타트업들은 어느 군가의 가사처럼 쓰러진 스타트업의 시체를 넘고 넘어 미래로 전진해갔던 것입니다. 호로위츠의 이야기를 통해, 신경제의 유토피아는 구경제의 냉엄한 현실을 뛰어넘기 전에는 결코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