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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민주주의의 원조"라고 자부하는 혁명의 나라입니다. 이에 반해 경제와 산업에서는 어떨까요? 일부에서는 프랑스를 영국에 한 발 뒤진 산업화의 열등생으로 평하기도 합니다. 정치적 혼란, 이념적 갈등이 두드러진 프랑스의 산업화 과정을 이끌었던, 19세기의 저명한 엔지니어, 경제학자, 정치인 미셸 슈발리에의 인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미셸 슈발리에는 1806년 프랑스 남부 리모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8살에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 최고의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명문학교죠.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진보적인 사상이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권위주의 정부 시절, 대학가에 민주화 운동이 격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공산주의의 원조라고 알려진 생시몽 주의가 당시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귀족 출신인 생시몽은 학생들의 우상이었으며 슈발리에도 그에게 열광합니다. 그는 약관의 나이로 생시몽 주의 잡지인 “글로브"의 편집장이 되어 매서운 필봉을 휘두르다가 기소되는데, 기가 꺾이기는커녕 재판정에서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로 판사를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석방 후 슈발리에는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고, 거기서 도로, 운하, 철도 등 인프라 건설 현장을 살펴봅니다. 엔지니어였던 그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미래의 비전을 구상하죠. 바로 “네트워크 사회"입니다.
생시몽은 인간, 기계, 세계가 모두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생각했는데요. 혈관, 신경, 근육이 신체 부분들을 연결하여 조화를 이루듯 세계도 그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세계의 혈관과 신경은 다름 아닌 철도, 증기선, 운하 등 교통 통신 인프라였습니다. 스승의 사상과 미국에서의 체험을 통해 슈발리에는 인프라 건설을 통한 세계의 연결을 꿈꾸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비전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는 나침반이 되죠. 슈발리에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학창 시절에 부르봉 왕조가 복원되었고 졸업 이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지배가 무너지고 보다 온건한 왕정이 수립됩니다. 그가 중년의 교수가 된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나 4년 만에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제2 제정이 시작됩니다. “난세에 식자 노릇 하기 어렵다”는 말처럼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처신은 쉽지 않았습니다. 슈발리에의 일생은 진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철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30대에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여 컬리지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는데 이 학교는 시장원리의 원조인 장 바티스타 세이가 재직했던 곳입니다. 공산주의자였던 슈발리에가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는 때로는 혁명정부의 친노 동정 책을 비판하여 진보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하고, 나폴레옹 정부의 고위직 제안을 수락하여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비난을 사기도 합니다. 좌와 우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슈발리에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네트워크 사회"를 건설하여 약자와 소외된 자를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그의 비전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 3세의 자문관이 된 슈발리에는 자신의 비전에 입각한 선 굵은 정책을 추진합니다. 당시 정부는 황제의 지지도에 연연하여 보호무역과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선호했으나 슈발리에는 자유무역을 역설합니다. 또한 정통성에 흠이 있는 쿠데타 정부는 내부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국제적 긴장을 선호하는데, 그는 거꾸로 세계평화론자답게 적대국 영국과의 평화 정책을 추진합니다. 슈발리에는 특사로서 영국을 방문하여 자유무역을 강화하는 통상조약을 전격 체결하는데요, 당시 프랑스 여론은 “경제적 쿠데타”라며 성토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슈발리에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충돌했던 또 다른 이슈가 있습니다. 바로 “특허 제도"인데요. 그는 특허가 지식과 아이디어의 교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정면 공격합니다. 왜일까요? 슈발리에는 “아이디어가 과연 재산인가”라는물음을 던집니다. 아이디어는 물론 개인의 노력이 투입된 성과물이지만, 과연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낸 것일까요? 그는 이를 길에 비유합니다. “우연히 발견된 샛길을 최초 발견자가 독점한다면, 그 길은 큰 도로가 될 수 없다.”
지적 재산권의 보호는 사람들의 혁신 노력을 고취하는 측면이 있지만, 지식의 외부 효과를 차단하는 부정적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초기 단계부터 아이디어에 보호막을 치는 것은 충돌과 융합을 막아 더 큰 발상과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게 되죠.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슈발리에의 눈에 과도한 특허 보호는 장애물로 비쳤던 것입니다. 또한 수학과 기초과학을 중시하는 프랑스 산업의 특성상, 지식의 공개와 소통을 강조한 것은 적절한 방향이었습니다. 현장 기술자의 경험과 역량이 중요했던 1차 산업혁명은 차츰 첨단 이론과학이 없이는 불가능한 2차 산업혁명으로 이행하고 있었죠. 과학과 기술의 융합, 경계 없는 아이디어의 소통이라는 그의 비전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혁신은 가치중립적인 이슈가 아닙니다. 국가간, 계급 간 이해관계의 갈등 속에서 정치와 이념은 혁신과 얽힙니다. 슈발리에는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약자와 소외된 자를 포함한 사회 모두의 행복을 위해 산업과 기술을 발전시킨다’는 목표와 네트워크 사회의 건설이라는 방법론을 평생 추구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변절처럼 보이는 처신에도 일관된 지향점이 유지되고 있었죠. 일관된 비전은 힘을 가집니다. 지중해 세계를 통합한다는 그의 비전은 오늘날 유럽연합으로 구체화되었는데요. 그 외에도 그가 생전에 구상했던 도버 해협 해저 터널,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 더 나아가 유럽의 화폐통합은 모두 현실이 되었습니다. 21세기에도 그의 비전은 아직 진행형입니다. 슈발리에가 오늘날의 4차 산업혁명을 본다면, 네트워크 사회를 향한 엄청난 가능성이 열린 것에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도 기술적 편리성, 시장 수익성만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좋은” 혁신이라는, 목표와 가치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