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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산업표준화 시작, 존 H홀

biumgonggan 2021. 8. 2. 13:57

고대 중국의 사상가 장자는, 한 수레바퀴 장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바퀴 구멍을 너무 많이 깎으면 헐렁거리고 적게 깎으면 뻑뻑해서 꼭 맞게 하려면 손 감각이 필요한데, 이것은 자식에게조차 가르쳐줄 수가 없다"라고 실토합니다. 오늘날의 첨단 기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옛이야기일까요? 이 문제는 1차 산업혁명이 완료된 20세기 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최초의 기계는 놀라운 혁신의 결과였지만, 문제가 있었죠. 수백만, 수천만 개의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현대적 기계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요? 부품이 표준화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어긋나는 부품을 기술자가 줄로 다듬고 깎아서 끼워 맞춰야 했습니다. 모든 기계가 서로 조금씩 달랐고, 문제라도 생기면 노련한 수리공을 불러와야 했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한 기계화는 아직 갈 길이 멀었던 겁니다. 최초로 이 문제에 도전한 것은 당시의 신무기였던, 총기의 제작자들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앞서 나갔지만, 곧 후발 주자였던 미국이 기회를 포착합니다. 총기 제작이 쉬워진다는 것은 정치가 불안한 나라의 지배층으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갓 독립을 쟁취한 미국은 국방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독립 투쟁으로 국민이 단합되어 혁신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총기 혁신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추진합니다.

 

그 일환으로 웨스트 버지니아주 <하퍼스-페리>에 대단위 병기창이 만들어집니다. 바로 이곳 셰넌도어 강변에 1819년, “존 H. 홀”이 관급 사업자로서 입주하게 되는데요. 홀과 美 군수성이 맺은 1 천정의 라이플총 납품 계약은 세계 산업의 헤게모니를 뒤바꿀 2차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됩니다. 홀은 하퍼스페리의 기존 인력과는 출신 배경이 남달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를 졸업했으며 그도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형편상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하퍼스 페리 사람들에게는 그가 좀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꿈꾸는 이론가"라고 불렀죠.

 

지금에 와서 보면, 그는 자질구레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핵심을 꿰뚫어 보는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표준화가 가능 하려면 부품이 정밀해야 합니다. 모두가 정밀도를 높이려고 노력할 때, 홀은 더욱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죠. 그것은 “아무리 높은 수준의 정밀도라도, 평범한 누구든지 해낼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숙련공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그대로인 한, 모든 개선 노력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죠. 명인의 경지에 오른 숙련공에게도 어려운 표준화를 어떻게 미숙련공에게 맡길 수 있을까요? 직선을 똑바로 긋는 것은 어른도 어렵지만, 정확한 자가 있다면 아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손 기술이 아니라 손 도구를 이용하는 건데요. 홀은 기술자의 손 도구인 게이지와 픽스처를 개량하고 다양화하여 체계적으로 적용했습니다. 게이지란 포탄을 대포에 넣어보기 전에 직경이 일치하는지 미리 맞추어보던 둥근 틀에서 기원했는데요. 홀은 용도별로 특화된 게이지를 60여 종이나 만들어 손 감각을 대체했던 것입니다. 또한 마모로 발생하는 오차를 잡기 위해 그는 삼중의 체크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게이지를 세 개씩, 즉 작업자용, 감독자용, 최종 검증을 위한 마스터용으로 구성하고 수시로 대조하여 오차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홀은 총을 만드는 기계보다도 이러한 도구를 만드는 기계에 힘을 쏟았고 이는 원가 상승 요인이 되었습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즈음, 업계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술이 무용지물이 될 것을 우려한 숙련공들은 홀을 깎아내리고 흠잡았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검사해 보니 품질은 탁월했고 시빗거리가 없었죠. 반대파는 전략을 바꿔 비용을 물고 늘어집니다. 총이 좋기는 하나 비싸다는 겁니다. 군수성도 제품에는 만족했으나 예산을 우려해 기대 이하의 물량을 추가 발주했는데요.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표준화는 ‘규모의 경제’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홀이 정부에 보낸 편지에는 “1 천정이든 3 천정이든 기계 설비는 똑같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고정비 분산의 원리인데요, 그가 규모의 경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전쟁이 발발했다면 대량생산의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유감스럽게도 평화가 지속되었습니다. 그의 총은 명성을 떨쳤지만 큰돈이 되지도 않았고 그의 표준화 방식이 널리 확산되지도 않았습니다.

 

표준화된 부품은 산업의 알파벳과 같습니다. 모든 언어가 이것으로 만들어지죠. 당대에 주목받지 못한 홀의 표준화는 시계, 재봉틀, 자전거를 거쳐 20세기 초 자동차 산업에서 포드의 오토메이션으로 완성됩니다. 홀의 혁신 이후 1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홀이 사망한 뒤, 평생의 반려자였던 아내 스타티라는 사회의 몰이해와 냉대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회고합니다. “남편이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면 부와 명예를 누렸을 것”이라고까지 얘기하죠. 투자가 부족하면 사재를 투입할 만큼 그가 이익보다 기술을 우선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세속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애석한데, 그는 역사에서도 거의 잊힐 뻔했습니다. 20세기 말에 와서야 메리트 로우 스미스 등의 경제사가들이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죠.

 

개인적 성공만이 유일한 목표였다면 홀의 혁신은 포기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횡단한 린드버그를 연상시키는데요. 숙련공의 세계에서 표준화된 기계의 세계로 가는 것은 그만큼 미지의 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길을 가야 했고 홀은 주저 없이 나아갔습니다. 홀이 세상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표준화에 대한 기술적 확신도 있었고 또한 사업 성공에 대한 믿음도 있었죠.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습니다. 자신의 사업 전망은 틀렸지만 기술에 대한 전망은 산업의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반드시 손에 쥔 금전적 이익으로만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넘지 못하는 기술적 장애물을 뛰어넘겠다는 열정이 더 중요하죠. 열정 때문에 이익을 희생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없는 성공이란,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