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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은 여러 측면에서 인간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중에서도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산업화에 대한 여성의 기여가 시대와 장소를 떠나 매우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했다고 합니다. 여성은 생산성에서 남성과 대등할뿐더러, 노동의 질에서도 남성과 차별화된 특유의 강점을 발휘해 왔습니다. 오늘은 산업혁명을 주도한 세 여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면화 공장의 여공에서 후일 저명한 시인이 된 루시 라콤, 흑인 여성의 미용 산업을 창설한 마담 워커, 그리고 인간의 달 착륙 프로젝트에 프로그래머로 참여했던 마가렛 해밀턴이 그들입니다.
루시 라콤은 1824년 매사추세츠의 한 가정에서 열 자녀 중 아홉째로 태어났습니다. 루시는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에 재능을 보였으나 아버지가 사망함에 따라 학교도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 무렵 미국의 사업가 프란시스 로웰은 영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매사추세츠에 면화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인력 부족으로 고민하던 로웰은 공장 주변 지역의 젊은 여성을 고용하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루시는 보조 직공으로, 11살의 나이로 취업합니다.
로웰은 여성을 고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여성 근로자들은 “로웰 걸스”라고 불리며 큰 화제가 되었고 이들을 보려고 공장을 방문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물론 이곳이 여성 근로자의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열악한 근로환경과 낮은 임금에 노사 갈등도 심각한 곳이었죠. 그러나 ‘로웰 걸스’는 현실의 어려움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웰 오퍼링”이라는 자신들만의 잡지를 만들었고 루시는 여기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인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10년간의 근무를 끝으로 루시는 회사를 떠나 교사가 되었고 미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 되었습니다. ‘로웰 걸스’ 시대의 여성 인력은 부족한 노동력을 메워 미국 산업혁명의 시동을 거는데 일조했으며, 당대의 고정관념을 깨고 여성 사회 진출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관심의 대상이었던 만큼 비난과 폄하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루시 라콤은 시인다운 품격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장 여직공이 구세계에서 결코 높은 지위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로웰의 여성들은 ‘공장의 숙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들은 구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에 속하기를 원했고 자신만의 전통을 만들어갔다.”
루시 라콤이 교사로 재직하던 1867년, 루이지애나주에서 사라 브리들러브라는 흑인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녀가 후일 성공한 여성 기업가가 되는 마담 워커입니다. 사라는 7살때 고아가 된 뒤 세탁부로 일하며 힘겨운 성장기를 보냅니다. 그녀의 삶에 새로운 기회를 가져온 것은 바로 2차 산업혁명이었습니다. 2차 산업혁명은 과학 기술과 오토메이션 시스템으로 대표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 혁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대규모의 소비시장이었습니다. 큰 배가 뜨려면 큰 물이 있어야죠. 사라가 세탁부로 땀 흘리고 있을 때, 대량생산 체제를 떠받칠 큰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사라는 이 시장을 감지합니다. 모발에 문제가 많았던 사라는 자가 처방전을 만들었고 이를 주변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케어는 무료, 제품은 유료”라는 원칙으로 직접 방문 판매에 나섭니다. 당시 백인 여성들도 미용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흑인 여성의 잠재 니즈를 알고 있었죠. 모발 관리는 흑인들의 소중한 전통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기후와 습도에서 모발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관리하던 조상의 지혜는 낯선 땅의 후손에게도 여전히 계승되고 있었습니다. 흑인들의 음악적 감각이 미국에서도 꺼지지 않고 블루스와 재즈로 변용된 것처럼 말입니다. 판매가 늘어나면서 그녀의 사업은 많은 흑인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성장기의 고난을 잊지 않고 동족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소비자로서 동시에 사업가로서 그녀는 자신의 성취를 평생 타인과 나누었습니다. 매스컴을 이용한 광고의 원조이기도 한 그녀는 신문 광고 영업맨 인 찰스 워커와 결혼했는데 이혼을 한 후에도 ‘마담 워커'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합니다. 브랜드로서 ‘마담 워커’는 ‘흑인 여성의 엘리자베스 아덴'으로 불렸고 그 위상은 1980년대까지 유지되었습니다.
마담 워커가 51세로 사망한 지 17년 뒤 1936년 인디아나주에서 마가렛 해밀턴이 태어납니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마가렛은 수학을 전공한 뒤 당시의 신기술이던 컴퓨터를 만나게 되고 NASA의 아폴로 계획에 프로그래머로 참여합니다. 그녀의 과업은 달 착륙선에 탑재할 운영 프로그램의 코딩이었습니다. 키보드, 모니터와 같은 장치는 물론 전용 소프트웨어조차 없던 시절,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된 이 초인적 과업을 통해서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비로소 만들어졌습니다. 일은 낮밤도 주말도 없이 진행되었고, 주말이면 마가렛은 사무실로 4살짜리 딸을 데리고 오면서까지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마가렛은 프로그램 세부를 꼼꼼하게 다루면서도 전체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컴퓨터에 과부하가 걸릴 경우 우선순위가 높은 작업에만 집중하는 조율 기능을 삽입했는데, 이는 인류의 달 착륙에 결정적 기여를 합니다. 착륙선 이글호가 ‘고요의 바다'에 내릴 때 과부하가 발생했고, 워닝 신호를 감지한 마가렛의 프로그램이 즉각 덜 중요한 과업을 차단하면서 이글호는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죠. 그녀의 사려 깊은 설계가 아니었다면 인류의 달 착륙이라는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스펙이 화려하고, 성과가 높은 사람을 인재라고 여기는 과거의 사고에 얽매여 있지는 않나요? 하버드와 스탠퍼드 중퇴자인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3차 산업혁명의 영웅이 되었듯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인재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여성이 그랬듯이 이제껏 부각되지 않던 다양한 마이너리티 그룹의 인재가 새로운 혁신의 씨앗을 품고 있을지 모릅니다. 인재와 역량을 보는 시각을 보다 넓혀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