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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계 유대인인 샌더스는 1941년 뉴욕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모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로 숨지자 졸지에 고아가 되어 미국에 건너온 아버지는 페인트를 판매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었죠. ‘왜 정치를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그가 늘 “1932년 히틀러가 선거에서 이겨 유대인 600만 명이 죽었다. 이보다 절실한 이유가 필요한가”라고 반문하는 이유입니다. 샌더스의 개인사는 다소 복잡합니다. 23세에 대학교 시절 여자 친구와 결혼했지만 불과 2년 만에 이혼했고 28세 때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을 낳아 미혼부가 됐죠. 47세에 아이를 셋 둔 현부인 제인 샌더스와 결혼해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요. 얼핏 보면 평범하고 푸근한 중년 여성인 제인은 샌더스의 정책 입안과 선거 전략에 깊숙이 관여해온 1등 참모 겸 정치적 동반자입니다. 그 스스로 “힐러리에게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있다면 버니에겐 내가 있다”라고 주장할 정도죠.

 

1964년 시카고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샌더스는 북동부 버몬트 주에 정착했고, 1971년 군소 진보정당인 자유 동맹당에 가입하며 정계에 입문했는데요 1972년과 1976년 두 번 연속 주지사에 도전했지만 득표율은 미미했고 그를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죠. 변변한 직업이 없었던 그는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꾸려나가며 지역 언론에 꾸준히 글을 써 자신의 정치 신념을 알렸습니다. 1979년엔 자유 동맹당도 탈퇴하고 지금껏 무소속으로 활동 중이죠. 즉 샌더스가 무상교육, 전 국민 건강보험, 부자 증세 등 다소 과격할 정도로 진보적 정책을 주창하는 데는 어려서부터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가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그의 흙수저 배경과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정치활동을 해온 그의 이력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무명 정치인 샌더스의 인생은 1981년 큰 전환점을 맞습니다. 단 10표 차이로 경쟁자를 누르고 버몬트 최대 도시 벌링턴 시장으로 뽑힌 겁니다. 버몬트 토박이는 아니지만 10년 간 사회적 약자 우대와 불평등 해소를 주창한 그의 ‘진심’이 유권자 마음을 움직인 거죠. 이후 8년간 벌링턴 시장을 지내며 벌링턴을 미국에서 가장 실업률이 낮고 경제활동이 활발한 도시로 만들었고 ‘미국 20대 시장’ 중 한 명으로 뽑히기까지 합니다.

 

1991년부터 16년간 하원의원을 역임하고 2007년 상원의원으로 워싱턴 정계에도 데뷔했지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점은 2010년 12월인데요. 당시 그는 부자 감세법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 즉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실시합니다. 필리버스터를 하는 많은 의원들이 전화번호부를 읽거나 잡담을 하며 시간을 때웠지만, 그는 부자감세 반대에 관한 자신의 과거 발언 및 소신을 담은 명연설을 장장 8시간 37분 동안 펼쳤는데요. 백발이 성성한 69세 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양극화 해소를 주창하는 모습은 금융위기에 지친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모습은 TV와 소셜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로 퍼졌죠.

 

2015년 4월 샌더스는 민주당 대선후보에 도전한다고 공식 발표합니다. 당시 샌더스의 지지율은 불과 6%였고 상대는 국무장관과 영부인을 지내며 막강한 자금력, 조직력, 인맥으로 무장한 힐러리 클린턴이었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이는 이 무모한 도전이 얼마나 이어질지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샌더스의 저력은 이때부터 발휘됐는데요. 우선 불평등 타파를 주창하는 정치인답게 액수 제한 없이 후원금을 모을 수 있는 슈퍼팩 설립을 거부했습니다. 소액모금을 통한 풀뿌리 후원금으로 두 달 만에 160억 원을 모았고 지지율도 빠르게 치솟았습니다. 2016년 2월 9일 버몬트 바로 옆 뉴햄프셔에서 열린 민주당 예비선거에서는 힐러리의 두 배 가까운 60% 지지율로 당당히 1위를 차지했죠. 평생을 약자 편에 선 한 정치인의 진정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샌더스가 시대를 따라잡은 게 아니라 시대가 그를 따라잡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뉴햄프셔에서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조직과 돈의 한계를 넘지 못했는데요. 힐러리 대세론이 굳어지면서 민주당 내부에서 그의 경선 포기를 촉구하는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샌더스는 민주당 대선후보가 공식 선출되는 2016년 7월까지 경선을 완주할 뜻을 밝혔는데요.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백악관 입성’이 아니라 평생 견지해온 진보적 정책을 미 전역에 설파할 ‘기회’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본산인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이념을 주창하는 버니 샌더스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