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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동독 출신의 촌스러운 중년 여성 앙겔라 메르켈이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습니다. 당시 그의 성공을 점친 사람은 드물었지만 10년이 지난 현재 그는 3선 총리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거듭났는데요. 특히 독일 경제를 부활시키고 우크라이나 사태, 그리스 경제위기, 과거사 반성 등 지구촌의 각종 문제에 깊숙이 개입해 세계적 지도자 반열에 올랐습니다.
메르켈은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폴란드계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이름은 앙겔라 카스너, 메르켈은 이혼한 첫 남편의 성입니다. 루터교 목사인 그의 부친은 딸이 태어나자마자 선교를 위해 동독으로 이주합니다. 브란덴부르크 주 시골에 정착한 그의 가족은 악명 높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감시 속에 우울한 날을 보냅니다. 수학과 과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메르켈은 1973년 명문 라이프치히대에 입학하는데요.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물리학을 전공합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77년 동급생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지만 성격차이로 곧 이혼했죠. 1978년 한 연구소에 취직한 그는 8년간 원자핵의 붕괴 반응을 연구해 박사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논문을 지도해준 화학자 요아힘 자우어 박사와 사랑에 빠져 1998년 결혼합니다. 그는 자녀가 없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집니다. 학창 시절 공산주의 비판 시를 낭송하다 퇴학 위기에 처한 바 있는 메르켈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야망에 불탔는데요. 이런 그를 주시한 사람이 거물 헬무트 콜 총리 겸 기민당 당수였습니다. 1982년부터 16년간 집권하며 통일을 이룬 콜은 독일을 넘어 자유세계의 리더로 군림했는데요. 그는 여성과 동독 출신이란 메르켈의 제약이 통일 독일에서는 오히려 장점임을 파악했고, 1991년 37세의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파격 발탁합니다. 뚝심 있고 진중한 메르켈을 아껴 그의 외모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나의 소녀(mein Madchen)'란 애칭까지 하사했죠.
1999년 콜이 총리 재직 시절 받은 불법 정치자금으로 기민당이 위기에 빠집니다. 메르켈은 “콜의 시대는 갔다. 기민당은 콜 없이 혼자 걸어야 한다”는 기고문을 내고 퇴진을 주도합니다. 그가 정치적 아버지와 맞서는 모습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는 기민당 최초 여성 당수가 되어 2005년 총선 승리를 이끕니다. 이에 메르켈은 독일 최초 여성 총리, 동독 출신 최초 총리, 제2차 대전 후 최연소 총리란 ‘3관왕’ 타이틀을 거머쥐는데요. 메르켈로 인해 사전에 없던 신조어까지 생겼습니다. 총리를 뜻하는 독어 칸츨러(kanzler)의 여성 명사인 칸츨러린(kanzlerin)이 등장한 거죠.
2005년 당시 독일은 12%의 높은 실업률, 제로 성장, 자동차와 중공업 등 핵심 산업의 경쟁력 약화로 '녹슨 전차' ‘유럽의 환자’라는 비판을 받았는데요. 메르켈은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복지제도 축소 등을 골자로 한 전임 슈뢰더 총리의 ‘어젠다 2010’을 물려받기로 합니다. 낡은 독일을 살리려면 정파 색깔이 중요치 않다는 이유죠. 그를 통해 환골탈태에 성공한 독일 경제는 현재 세계의 우등생입니다. 독일인들은 메르켈을 엄마를 뜻하는'무티(Mutti)'로 부릅니다. 문제가 생기면 척척 해결해주는 엄마처럼 국민이 믿고 의지할 지도자라는 뜻이죠. 청춘을 연구실에서 보낸 학자답게 메르켈은 성실과 원칙을 중시합니다. 이는 과거사 문제에서 두드러지는데요. 2015년 3월 일본을 방문해 동갑내기 아베 총리에게 “과거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라”며 직격탄을 날렸고요. 두 달 후 독일 총리 최초로 다하우 나치 수용소를 찾아 “전후세대도 나치의 잘못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엔 마침표가 없으며 잘못을 자각하는 건 독일인의 의무”라고 강조해 대국의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5년 2월 우크라이나 휴전 회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불러 16시간의 마라톤협상을 성사시킨 주역도 메르켈입니다. 유럽 최장수 여성 지도자 메르켈! 앞으로도 계속 메르켈의 행보를 주시해야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