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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동차 회사의 회장이 임원들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타이어에 펑크가 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기사는 황급히 차를 세우고 수리에 들어갔고, 임원들은 잠시 차에서 내려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쉽게 그려지는 그림인데요. 그런데 어느 순간, 회장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회장님이 어디 가셨지?'하고 찾아보니, 그 회장님은 펑크 난 차량 뒤편에서 손에 잭과 스패너를 쥔 채 운전기사를 도와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있었습니다. 이마와 와이셔츠에는 땀이 흥건했다고 하는데요. 바로 인도 최대기업 타타그룹의 다섯 번째 회장, 라탄 타타의 일화입니다. 라탄 타타는 타타그룹 창업주의 증손자로 경영권을 승계받아, 회장 취임 20여년 만에 타타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낸 인물입니다.
1868년 창업해 무려 1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타타그룹은 인도 GDP의 3%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기업인데요. 하지만 세계 부호 명단에서 라탄 타타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가 왜 인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경영자인지 알 것도 같은데요. 지금부터 라탄 타타 회장의 특별함을 본격적으로 해부해보겠습니다.
사실 회장 취임 초기만 해도 내향적 성격의 그가 경영자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탄 타타는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원칙에 입각한 과감한 혁신을 주도하며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습니다. 취임 직후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시련은 그룹의 중심 기업 타타스틸의 내분이었습니다. 신구세대 경영진 간 다툼은 창업자 집안싸움으로 대서특필됐고, 타타그룹을 바라보는 인도 국민들의 시선도 싸늘해졌는데요. 바로 이때, 라탄 타타는 그룹의 회장으로서 경영진 교체에 대한 원칙을 정립, 단칼에 내분을 잠재웠습니다. 75세가 되면 경영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경영진의 세대교체를 단행한 것인데요. 이참에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고 결심한 그는 경영진의 세대교체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타타그룹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로 한 건데요. 그리하여 1998년, 산업보국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엄격한 기업윤리 등 오늘날 타타그룹을 대표하는 핵심가치가 대내외에 천명되었습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도 본격화되었습니다. 물론 구조조정에도 원칙이 있었는데요. 인도 내에서 3위 안에 들 수 없는 기업은 과감히 매각하고, 장래성 있는 사업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료와 화장품, 시멘트처럼 미래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은 예외 없이 폐지 혹은 매각되었고, 소매와 통신, 바이오 같은 미래 신수종사업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라탄 타타가 주도한 혁신의 최고정점에는 타타자동차가 있습니다. 특히 지난 2008년 선보인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승용차, 나노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나노베이션'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을 정도였죠. 이 나노 베이션의 시작은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라탄 타타 회장은 어느 비 오는 저녁, 스쿠터 한 대에 몸을 실은 서너 명의 가족이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는데요. 인도에서는 사실 무척 흔한 광경이었지만, 타타 회장은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스쿠터 한 대 가격에 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어야겠다!' 2004년 라탄 타타 회장은 전 국민 앞에서 "10만루피짜리 국민차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이 지켜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죠. 이륜차 두 대를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만 씌우는 것 아닌가?, 실제로는 10만 루피보다 훨씬 비쌀 것이다 등등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쨌든 10만 루피로는 제대로 된 자동차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죠. 아니나 다를까, 초저가 자동차의 개발과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무수한 시행착오의 연속! 실패 보고서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개발자들은 새로운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혹시나 질책을 받지는 않을지 마음을 졸였습니다. 하지만 라탄 타타는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운전기사를 도와 펑크 난 타이어를 갈아 끼웠던 것처럼, 자신도 개발 프로젝트의 팀원으로 참여해 직원들을 독려했죠.
마침내 2008년 1월 10일 오전 11시 30분,수많은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델리 자동차 엑스포 전시장에 라탄 타타 회장이 탄 나노가 등장했습니다. 나노 개발 성공에 대한 타타 회장의 설명이 이어지며 장내는 박수와 환호성이 가득했죠. 열기는 점점 고조되었고, 타타 회장은 "마지막으로 가격은..."이라고 하며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한 4년 전과 비교해 철판이나 타이어 등 자재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 전시장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죠. "그렇지만 가격은 10만 루피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2년 말, 라탄 타타는 타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스스로가 정한 75세 정년의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약속은 약속이기 때문에! 그는 미련 없이 은퇴를 선택했고, 우리는 그 덕분에 원칙과 약속의 가치를 아는 경영자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