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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냉장고가 있는데요. 냉동고는 없습니다. 냉장고를 열였는데 내부 온도가 무려 10도입니다. 이런 냉장고가 팔릴까요? 대박이 났습니다. 인도에서 성공을 거두었고요. 동일 모델을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초투쿨’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인도에는 ‘고드레지(godrej)’라는 그룹이 있습니다. 1897년에 설립되었으니 벌써 12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농업, 소비재, 화학, 건설, 전자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요. 냉장고도 그중 하납니다. 1990년대 후반 접어들며 LG, 삼성, 월풀이 높은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를 기반으로, 인도의 냉장고 시장에 치고 들어왔습니다. 고드레지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죠.
잠시, 2010년경으로 가보겠습니다. 당시에는 인도인의 20%만이 냉장고를 사용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80%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얘기죠. 당시 인도의 빈곤층은 4억 명.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해 고드레지는 자사 직원 천 명을 빈민가와 시골에 보냈습니다. 글로벌 기업은 할 수 없는, 로컬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한 거죠.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냉장고가 필요하십니까?” 이렇게 물었을까요? 아닙니다. “어떤 제품을 시원하게 보관하고 싶으신가요?”, “그 제품을 시원하게 보관하고 싶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빈곤층의 라이프스타일은 인도의 부유층과 달랐습니다. 빈곤층은 식품을 매일 구매합니다. 보관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사지 않으면 식품이 상하는 거죠. 냉장고를 둘 곳도 마땅히 없었습니다. 집 크기가 14제곱미터, 4평이 조금 넘으니까요. 거실과 침실의 구분조차 없지요. 게다가 툭하면 이사를 갑니다. 냉장고가 있더라도, 그 무거운 걸 들고 이사 다니려면 쉽지 않죠. 그런데요. 조사하던 중에, 중고 냉장고를 사용하는 가정을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무얼 보관하는지 궁금했죠.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물 말고는 들어 있는 게 없었습니다. 겉은 냉장고지만, 실상은 물병을 넣어놓는 사물함에 불과했던 거죠. 냉장고가 돌아가려면 전력이 필요한데요. 빈민가는 전력 공급이 불안정합니다. 혹시 여러분 집에서 전기가 나가본 경험 있으신지요? 다른 것도 문제지만 냉장고나 냉동고 안에 있는 식품이 상하는 게 가장 큰 걱정이죠? 툭하면 정전이 되다 보니 냉장고가 있어도 냉장고답게 쓸 수가 없었던 겁니다. 물론 전기료도 문제였죠.
2010년 2월, 고드레지 그룹은 새로운 개념의 냉장고를 선보입니다. 명칭은 ‘초투쿨(ChotuKool)’. 힌디어로 ‘초투’는 작다는 뜻이고요. 쿨은 차다는 뜻입니다. 가격은 약 70달러, 당시 인도에서 가장 저렴한 냉장고의 절반 가격에 맞췄습니다. 전기가 문제였으니 전기도 버립니다. 압축기와 냉매를 버리고 12 볼트의 배터리를 장착했죠. 기존 냉장고는 부품이 200개 정도인데, 이걸 스무 개로 줄입니다. 냉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김치냉장고처럼 위에서 여는 방식을 채택했죠. 단열재를 사용해서, 배터리가 떨어져서 전원 공급이 끊기더라도 몇 시간은 냉기가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용량은 43리터, 무게는 8.5kg입니다. 어린이 몇 명이 들어도 될 정도죠. 그 당시 가장 작은 냉장고가 170리터에 30kg이었거든요. 고드레지는 이걸 4분의 1로 줄였습니다. 냉장고 내부 온도도 10도 전후로 맞춰서, 그만큼 전기를 덜 쓰게 만들었습니다. ‘작고 가볍고 집에 들여놓을 수 있다. 이사 갈 땐 머리에 이고 가면 된다.’ 딱, 인도의 빈민층이 원하던 제품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냉장고’라기보다는, 아이스박스에 배터리가 장착된 기계였죠. 사실, 시원하기만 하다면, 그게 냉장 고면 어떻고 아이스박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건요. 가격이 절반 가격이었는데도, 기대만큼 수요가 늘지 않았습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시골 주민의 소득 수준으로 볼 때, 70달러도 만만한 금액이 아니었던 겁니다. 여기서 골드 레지의 ‘신의 한 수’가 나옵니다. 바로, B2B 루트를 뚫은 거죠. 이들은 구멍가게 주인에게 초투쿨을 들여놓고 여기에 물과 초콜릿을 보관하면 그만큼 판매가 늘어날 거라고 설득합니다. 과일, 야채, 유제품을 파는 상인에게는 남는 물건을 초투쿨에 보관하면 그다음 날에도 팔 수 있다고 어필했죠. 실제로 시뮬레이션해보니 초투쿨을 할부로 구매한다고 해도, 4~5개월이면 본전을 뽑는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초투쿨은 발매 첫해 약 10만 개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죠.
신제품을 개발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소개해드린 고드레지는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농촌 가정에, 또 빈민 가정에 초투쿨이 들어가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요? 매일 신선한 우유와 상하지 않는 과일, 야채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건강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죠. 굳이 냉장고가 아니더라도 신선식품을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는 저렴한 기기가 개발되면, 회사를 위해서, 또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개도국 기업이 자국 빈민층을 위해 제품을 개발하는 이러한 방식을 ‘프루걸 이노베이션(Frugal Innovation)’이라고 합니다. 흔히 ‘검약적 혁신’, ‘검소한 혁신’으로 번역되죠. 중국과 인도 같은 신흥국가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R&D의 한 방법론인데요. 여러분도 한번 고민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제품 개발할 때 어떤 고민을 해야 할지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