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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건 전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형사 사건이 있는데요. 1924년 10월 10일 경성복심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린 김정필의 사건 재판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날 60여 명이 입장할 수 있는 방청권을 얻기 위해 새벽부터 인파가 몰려들었고, 개정을 한 시간 앞두고는 그 열 배가 넘는 600여 명의 인파가, 재판 시작 직전에는 2천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종로 일대 교통이 마비될 지경이었는데요. 쥐약으로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스무 살 촌색시 김정필이 그처럼 거대한 인파를 한 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법원 앞에 모인 2천여 인파는 3.1 운동 이후 종로에 운집한 최대의 인파였습니다. 당시 김정필 공판이 이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시대일보에 실린 방청객의 수기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함경도 명천 태생으로 본부(本夫)를 독살했다는 김정필은 뜻밖에 온 도시의 인기를 끌었나니 절세미인이란 방자를 접하려고 몰려드는 군중은 그야말로 천으로 헤아리고 만으로 헤아렸으되 방청석이 좁은 까닭으로 헛되이 뒤통수를 치며 돌아선 이가 많았다.
그녀는 키가 헌칠했다. 참으로 희다. 희다 못해서 금강석 같이 눈부시다. 알맞게 오뚝한 코는 참으로 귀골이고 이지적이었다. 그중에도 큼직한 그 눈! 어쩌면 저렇듯 청결 무구하랴. 어쩌면 저렇듯 복잡다단하랴. 어찌 보면 단순한 빛이요. 어찌 보면 오색이 영롱하다.
김정필은 1905년 함경북도 명천군 궁벽한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김정필은 스무 살 때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세 살 연하의 남편 김호철과 구식 혼례를 치렀는데요. 결혼한 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김호철은 심한 구토를 하며 앓아눕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들 병세에 차도가 없자 모친은 아들에게 도대체 무얼 먹고 그 지경이 됐느냐고 물어보는데요. 김호철은 그때서야 아내가 준 주먹밥과 엿을 먹은 후부터 배가 아프다고 말합니다. 모친은 며느리가 아들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주재소에 고발하는데요. 그 즉시 김정필은 체포되고, 김호철은 그 이튿날 사망합니다. 부검 결과는 쥐약으로 사용되는 황린에 의한 독살이었습니다.
다툼의 여지가 없었던 사건이었던 만큼, 수사는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움직일 수 없는 물적 증거를 내밀자 김정필은 범행 일체를 자백합니다. 경찰 조사, 검찰 조사, 예심을 거쳐 1심 판결에 이르기까지 한 달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청진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한 김정필은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함경북도 명천에서 벌어진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은 조용히 종결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2심을 앞두고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사건이 경성복심법원으로 넘어오자, 사건은 비로소 신문지상에 보도되는데요. 동아일보 1924년 7월 17일 자에 보도된 한 단짜리 기사는 뜻밖에도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킵니다. “방년 스물의 꽃 같은 미인이 자기 남편을 독살하고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건이 작일에 경성복심법원으로 넘어왔다.”라는 기사 도입부의 한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투서와 탄원서가 답지하면서 재판은 그 후로 석 달을 끌게 되는데요. 살인 사건 공판을 앞두고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 피고인을 ‘살려야 하느니’ ‘죽여야 하느니’ 투서 전을 벌이는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기현상이었습니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진행된 2심에서 김정필의 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김정필이 상고를 포기하여 형은 그대로 확정됩니다. 김정필은 수감 생활 대부분을 바느질을 하며 보냈고, 서대문형무소 여죄수 사이에서도 단연 인기를 끄는데요. 그 덕분에 3차례 감형돼 수감 12년 만인 1935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됩니다. 그 기간 동안에도 ‘독살 미녀 김정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식지 않아 그녀의 옥중 근황 기사는 신문 잡지에 지속적으로 보도됩니다.
남편을 독살한 무기수 김정필이 1920~30년대 조선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그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미인이라는 소문 때문에 세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고, 미인이라는 소문 때문에 세인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미인이라는 소문은 신문 기사가 그렇게 보도했을 뿐, 방청객 르포 기사에서도 “천하일색이다.” “예쁘기는 하지만 일색은 못된다.” 등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독살 미인 김정필 사건은 언론의 선정주의와 외모지상주의가 어우러져 빚어진 해프닝이었는데요. 대중이 편견을 가질 때, 사건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습니다.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면 믿는 대로 사실이 왜곡된다는 말입니다. 김정필 사건과 같은 해프닝이 우리 시대에는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