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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스토리

설렁탕 원조 '선농탕'

biumgonggan 2016. 8. 3. 09:43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국민음식 설렁탕.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인물 김 첨지가 아픈 아내를 위해 사온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설렁탕의 유래를 명확하게 얘기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오랜 기간을 즐겨온 소울 푸드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설렁탕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 중에, 가장 유력한 설은 선농제와 선농단으로 시작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에서 입춘 뒤 선농제를, 입하 후 중농제를, 입추 후 후농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고려 성종 때 신농씨와 후직씨를 제향(나라에서 지내는 제사)한 기록이 있고, 신농씨가 바로 선농신으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그 선농신을 모시는 제사, 선농제와, 그것을 지내던 선농단이 바로 설렁탕의 시작이라는 설이다. 이름까지 비슷해, 어딘가 모르게 믿음을 주기도 하는 설이다.

선농단은, 가뭄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농사에 관한 전반을 다루는 곳이 됐다. 조선에 와서는 경칩(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때, 양력으로 35일 또는 6일 경) 뒤 길한 날을 골라 제를 올렸는데, 이 때 제물로는 쌀과 기장, 고기는 소와 돼지를 날것으로 올렸고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나라에서 정한 제사이다 보니 많은 인력이 동원될 수밖에. 이 때 수고한 조정대신과 일반 백성들에게 소를 잡아 국말이 밥과 술을 내렸는데, 그 국밥을 선농단에서 내린 것이라 하여 선농탕이라 칭했다고 한다.

 선농탕이 인기가 올라가자, 여느 장사 풍경과 같이 모방가게가 늘어난다. 하지만 똑같은 이름을 쓸 수는 없는 법. 가게들이 조금씩 바꾸어 쓰기 시작해 지금의 설렁탕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음식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1900년대 초 조선총독부 주도로, 전쟁물자 보급을 위한 육우 대량생산이 시작됐다. 식용 소고기 생산 정책으로 경성 내 정육점이 크게 늘어났고, 이것은 설렁탕이란 음식과 맞물리게 됐다. 이들 정육점에서는 소고기를 팔고 남은 소뼈와 그 부산물까지 팔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을 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대 설렁탕 유행의 시대가 찾아왔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성의 설렁탕 집은 100여개를 넘어섰고, 어느새 설렁탕은 체면 때문에 먹길 꺼렸던양반이나 모던보이, 모던 걸들의 단골음식이 되어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가 잘 되는 품목을 따라하는 건 매한가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래도록 살아남는 것들의 공통점은, 단지 모방에서 끝나지 않고 고민과 개발을 통해 발전시켰던 것들이다. 우리네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설렁탕은, 세월의 격변과 함께 진화를 거듭해온 혼이 담긴 음식이다. 선농탕이 현재의 설렁탕이 되기까지 다양한 시도와 도전이 있었음을 상기하며, 설렁탕 한 그릇과 함께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을 구경해보는 것도 좋은 서울구경코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