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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명품 문화

biumgonggan 2021. 7. 30. 14:47

출처 : 재단법인 아름지기

신라인들은 우리 역사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문화를 즐긴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명성에 맞게 신라시대에도 이른바 명품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오늘은 신라의 명품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해외에서 들여온 물품을 백성들이 앞다투어 사용하자, 흥덕왕은 신분에 따라 촘촘한 규제를 정합니다. 우선 지금의 패션에 해당하는 <색복> 규정을 살펴보면, “6두품 여인들은 금은실·공작 미·비취 모을 쓰지 마라. 빗과 관은 슬슬 전과 대모로 장식하지 마라.”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비취모’는 캄보디아(진랍국) 등에서나 겨우 잡히는 비취죠, 즉 물총새의 털로 만든 허리띠입니다. 그리고 ‘공작 미’는 인도와 아프리카, 동남아 일대에서 서식하는 공작새의 꼬리를 말하고요. 슬슬 전은 수많은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해서 장식한 명품 중의 명품이었으니, 신라시대 귀족들의 해외 명품 사랑이 얼마 정도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뿐만 아니라, 천마총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귀걸이 등 장신구를 보면 전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12세기 아랍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신라에서는 개의 목걸이도 황금이었다”라고 했을 정도로 신라시대 때는 황금이 흔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생활용품 역시 외제품만을 사용하자, 흥덕왕은 6두품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금·은 도금그릇 사용을 금할 것을 명합니다. 심지어 삼국유사에는 <금입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글자 그대로 황금이 쏟아져 들어가는 집, 혹은 황금으로 잔뜩 치장한 호화저택을 의미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편, 신라인들은 지금으로 치면 자가용에 속하는 <거기> 즉 수레의 치장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또 다시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진골은 수레의 재목은 자단과 침향을 쓰지 못한다. 6두품 여자는 물론 5·4두품, 아니 백성 여자들까지 자단과 침향을 말안장 틀로 사용하지 못한다. 금·은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진골들은 물론, 6·5·4두품과 일반 백성들까지도 ‘말안장 틀’을 명품으로 장식했다고 하는데요. 자단은 인도와 스리랑카 원산의 유향 목재입니다. 재목이 향기롭고 견고하며 속은 암 홍자색을 띠어 아름다워 건축 및 가구 등에 쓰이고요. 침향의 주산지 역시 베트남과 수마트라입니다.앞서 소개해드린 흥덕왕의 규제내용을 종합해보면 귀족들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의 모습은 고급 승용차를 선호하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있는 듯하죠.

이처럼 흥덕왕이 신라의 사치향락풍조를 개탄하던 8세기 이후 신라는 외형상 최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해외 명품이 당나라를 통해 서역 상인들과 함께 경주로 들어오면서 경주는 지금으로 말하면, 완전한 국제도시가 되었는데요. 경주의 귀족들은 앞다퉈 명품을 사들였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사치향락의 풍조가 번지게 된 것이죠.

흥덕왕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헌강왕은 880년 월상루에 올라 민가를 살펴보며 태평성대를 자랑합니다. 백성들의 집에서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이 엮어있는 모습들을 보며 매우 기뻐했다고 하죠. 하지만 그로부터 9년 뒤,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가 단 9년 만에 급전직하한 것일까요? 사실 망조는 진작에 들어 있었으나 신라의 왕들이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죠. 신라는 혜공왕부터 진골귀족 사이에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등장하는데요. 정세가 어려운 사이 귀족들은 저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죠. <삼국유사>에 나온 ‘금입택’ 39곳에는 김유신의 종갓집도 포함돼 있었는데요. <신당서> ‘동이열전·신라조’를 살펴보면 “(신라의) 재상가는 재물이 끊이지 않는다. 노비가 3000명이고, 갑옷을 입은 사병과 소·말·돼지의 숫자도 역시 각각 3000명과 3000마리였다” 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를 보면 “백성들이 앞 다퉈 사치와 호화를 즐긴다. 해외 명품만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 예의가 무시됐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졌다.”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흥덕왕은 이에 단단히 화가 났고, 이어 843년 백성들에게 서슬 퍼런 법령을 내리게 되죠. 흥덕왕이 재임 시절 동안 언제부터 사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점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되돌리기에 이미 늦은 때였다는 것이죠. 이전의 왕들 역시 나라의 망조를 미리 알았더라면 천년 역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