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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종로. 구름 같은 구경꾼들을 거느리고 한 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싸움의 승세는 한쪽으로 기울고, 상대의 마지막 일격에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다. 당황한 빛이 역력한 이 남자는 당시 종로 뒷골목을 주름 잡았던 전설의 싸움꾼 구마적. 그리고 그를 쓰러뜨린 장본인은 이제 막 아이 티를 벗어난 17세의 앳된 청년 김두한이었다. 당대 최대 상권을 자랑하던 종로의 질서가 순식간에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질서의 한복판에는 우미관이라는 극장이 존재한다.

우미관(優美館)은 한국 최초의 상설극장이다. 1910년 종각 부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고등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져 1915우미관으로 그 이름을 바꾼다. 극장은 2층 벽돌 건물에 1,000명 가량이 관람할 수 있는 긴 나무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항상 2000명이 넘는 관람객으로 들어차 극장 안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미관 구경 안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우미관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졌다.

그러나 1959년의 화재로 화신백화점 옆으로 자리를 옮긴 1960년대부터 우미관은 기울기 시작해 나중에는 2류 재개봉극장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결국 적자운영에 시달리다 19821130일에 폐업이 되면서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우미관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 제일의 주먹이었던 김두한의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때문에 우미관의 치솟는 명성은 김두한의 명성과도 일치했다. 김두한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우미관을 근거지로 삼았던 구마적에게 도전하여 승리를 거뒀고, 19세 때는 종로뒷골목의 또 다른 강자인 신마적과 대결을 펼쳐서 중상을 입히고 완전히 제압하고 만다. 이로써 십대의 나이에 종로 뒷골목의 양대 산맥이었던 구마적과 신마적을 모두 다 쓰러뜨린 김두한은 19세의 나이로 종로의 새로운 지배자로 화려하게 등극하게 된다.

물론 그 같은 일은 지금은 절대로 재현될 수도 없고 용납되지도 않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그 시절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김두한과 함께 당시의 낭만을 상징했던 우미관 역시 이제는 볼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지금은 인사동 초입 건너편에 위치한 우미호텔 위치에서 당시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