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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취해 있으라! Enivrez-vous sans cesse!”“술이든, 시든, 미덕이든,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무엇에든 취해 있으라 De vin, de poesie ou de vertu, a votre guise”낭만주의 보들레르는 무엇에든 취해 있으라고 읊었습니다. 편의상 ‘술’이라고 번역하기는 하지만 이때 보들레르가 가리킨 술은 와인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도 와인을 종종 즐기십니까? 서양미술에는 술잔을 들고 있거나 술을 마시는 인물이 꽤 많이 등장하는데요 압도적인 비율로 와인이 대부분입니다.
그림 속 와인들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요? 일단 구역 성경에 와인이 등장합니다. 대홍수를 겪고 난 뒤 노아는 포도를 경작해서 와인을 만듭니다. 인류 최초의 술이었던 셈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창세기>에도 와인에 취해 옷을 벗고 잠이 든 노아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도 와인은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외눈박이 거인의 동굴에 갇혀서 꼼짝없이 잡아먹힐 위기에 놓였는데, 이때 오디세우스 일행은 포도를 짓찧어서 와인으로 만들어서 거인에게 마시게 합니다. 거인은 태어나서 처음 와인을 맛보고는 정신을 못 차리죠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오디세우스가 건넨 와인을 먹고 취한 거인은 하나밖에 없는 눈을 찔리고 맙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술을 관장하는 신은 디오니소스입니다. 출생부터 범상치 않았던 디오니소스는 온갖 곡절을 겪으며 성장합니다. 미술에서 디오니소스를 묘사할 때는 포도송이와 함께 등장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디오니소스>는 술살이 적당히 붙은 현실적인 몸매가 인상적이죠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신 중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대비시켰습니다. 아폴론은 이성과 논리, 균형과 질서, 절제를, 술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는 광포한 열정, 방탕, 혼돈을 가리킵니다. 일단 술에 취하면 온전할 수가 없으니까요. 술은 양가적입니다. 즐거움을 불러일으키지만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도 이르기도 하죠. 그래서 서양미술에서, 술을 묘사한 그림들이 풍기는 분위기도 양가적입니다. 카라바조가 그린 <디오니소스>는 화가 자신이 디오니소스의 모습인데요, 방종과 일탈의 결과로 수척해진 모습입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가 그린 <디오니소스의 승리>에서는 농민들이 와인을 들이켜며 꾸밈없이 기뻐합니다. 농민의 노동이야말로 나라의 기둥이니까, 농민들은 와인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지요.
와인은 기독교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나리자>의 맞은편에는 대작이 걸려 있는데, 이탈리아 화가 베로네세가 그린 <가나의 혼례>입니다. ‘가나의 혼례’에서 예수는 잔치에 쓸 와인이 떨어지자 물을 와인으로 바꿔 놓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맨 처음으로 보인 기적이었죠.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와인을 자신의 피라고 선언했던 것과 더불어, 와인은 가톨릭 전례의 핵심을 이룹니다. 한편으로 인간을 도취시켜서 윤리적 굴레를 벗어던지게 하는 와인이 종교적으로 결정적인 상징이라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죠.
페르메이르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와인이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남성이 와인을 건네고 여성이 그걸 받아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와인을 건넨다는 건 성적인 접근을 의미했고, 받아 마시는 건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남녀가 어울리면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모습만 그려 놓아도 관객들은 남녀의 욕망을 읽어냈습니다. 윤리적으로 엄격한 분위기였던 네덜란드 시민 사회에서는 욕망을 그림에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어서 이처럼 암호와 같은 의미를 담은 그림이 유행했습니다.
그런가하면 18세기 프랑스 귀족들의 그림 속에서 값비싼 굴을 먹는 귀족들은 절제를 할 생각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 줄지어 놓여 있는 샴페인을 터뜨려 흥겨운 분위기를 북돋습니다. 이 시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도시를 그린 그림에서 와인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가까스로 지탱하는 도구입니다. 몸을 써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 곁에도 와인이 있습니다. 물론 비싸고 좋은 와인은 아니었겠지요. 와인을 마시면서 일을 하면 더 힘들고 고되겠지만, 와인이 있었기에 견뎌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로트레크의 그림에서 카페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합니다. 이들은 이 순간을 와인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서양에서 와인은 복잡한 문화적 의미를 담아 왔고, 그림에서도 다양한 맥락 속에서 등장하며 인간의 희로애락을 부각해 보여줍니다. 다시 처음 살펴봤던 보들레르의 문장으로 돌아가 볼까요. 보들레르는 ‘늘 취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취해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게 인간의 비극이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