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원 화성은 조선후기 정조 때 만들어진 성곽이다. 성곽의 전체 둘레는 5,520m이며, 대부분의 시설이 잘 남아있다.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성곽을 쌓아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모두 살린 평산성이다. 성곽에는 창룡문·화서문·팔달문·장안문의 사대문을 비롯하여 암문·수문·적대·공심돈·봉돈·포루·장대·각루·포사 등의 각종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성곽은 1794년(정조 18) 1월 영중추부사인 채제공의 주관하에 착공하여 1896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중간에 6개월간 공사가 중지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28개월만에 완공된 큰 역사였다. 이 성의 축조에 소요된 인적 물적자원은 실로 막대하다. 동원된 인력은 고사하고 기술자만도 11,820명이며, 공역에 소요된 전체경비가 87만 3,520냥과 양곡 1,500석의 물량이 투입되었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과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이곳에서 쉬려고 했던 마음이 합해져 만들어졌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 화성으로 옮겨 만들었고, 이곳에 새로운 신도시를 만들어 후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이곳 신도시에 머물고자 계획한 것이다.
화성은 주위의 자연조건을 최대한 살리면서 과학적 방법으로 성곽을 축조하였다. 이후 화성 신도시에는 중앙에서 재상급이 통괄하는 유수부가 설치되어 기존의 개성, 강화, 광주유수와 함께 서울 외곽의 행정과 군사적 거점이되었다. 특히 화성신도시에는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주둔하여 4개의 유수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수원의 화성은 피난처라기 보다는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하는 형태로 구릉지대를 연결하여 건설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특이한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군사기지로서 남쪽의 독산성과 협공체제를 이루도록 설계하고, 화강암을 기본재료로 하면서도 벽돌을 함께 사용하여 견고하게 만들었다. 성곽의 외벽과 성 위에 덧쌓은 여장 총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각 시설물에는 총포구멍을 만들어 군사방어체제를 완비하였다. 아울러 성문에는 옹성과 오성지를 두었으며, 성곽 곳곳에 벽돌을 활용한 공심돈과 포루 등이 시설되어 당시로서는 최첨단 전투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수원의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성곽의 이용도가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정치 · 군사 · 상업적인 기능을 동시에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점, 성곽의 정교함과 과학적 설계로 18세기 동양성곽의 정수를 갖추고 있다는 점, 성곽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모든 시설물이 인공과 자연의 조화, 신기술과 전통기술의 융합, 평상시와 비상시의 기능결합 등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외관과 함께 실용적 기능을 겸비하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