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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조선 초기 태종이 1405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다만 창덕궁의 모든 건물이 이때 완공된 것은 아니다.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에 완공되었고, 궁궐에 부수적으로 있었던 여러 건물과 연못 누각 등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지어졌다.
처음에는 경복궁을 정궁으로 하고, 경복궁에 만일의 사태가 있을 경우 머물 수 있도록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든 궁궐이 소실된 후 창덕궁은 1609년에 복원되었지만 경복궁은 1876년에 복원되어 조선후기 약 300여 년간은 역대 임금이 창덕궁에서 정사를 봄으로써 정궁의 구실을 하였다. 궁궐안의 건물들은 조선후기 잦은 화재로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특히 1917년의 화재 후 1919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주관하면서 경복궁의 내전 건물들을 뜯어다 희정당과 대조전을 다시 짓고, 일부 건물은 형태나 규모를 전과 다르게 개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부는 서양식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창덕궁 내의 각 건물 명칭은 세조 때 붙여진 이름들이다.
창덕궁은 정전과 정문 등으로 이루어지는 외전과 정침 및 주변 전각들로 구성된 내전, 그리고 후원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외전에는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 등의 출입문과 왕이 국가의 각종 의식을 행하는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이 있다. 내전에는 왕이 머무르는 희정당과 왕비가 있는 대조전을 비롯하여 경훈각, 성정각, 징광루 등 수많은 건물이 있다. 내전 건물뒤 경사진 곳에는 왕비를 위해 꽃계단을 만들어 놓고, 그 뒤의 산자락을 이용하여 후원을 만들었다. 후원에는 큰 연못과 함께 부용정, 주합루 등 다양한 건물과 누정들을 만들어 왕과 왕비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창덕궁에서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광해군 때 재건된 돈화문이며, 그 다음이 1647년(인조 25)에 지어진 선정전, 1745년(영조 21)에 세워진 인정문,1804(순조 4)년에 세워진 인정전이다.
창덕궁은 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좌우의 형태로 지어졌다. 즉 궁의 서남쪽에 정문을 두고 다시 동북방향에 정전을 꾸몄으며, 정전의 동쪽에 내전을 두고 그 뒤의 언덕 지형조건을 그대로 잘 살려 후원을 조성하였다. 창덕궁이 바로 자연적 환경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전통 궁궐건축의 미를 한껏 발휘하였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창덕궁 후원을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 오늘날까지도 창덕궁이 곧 비원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이다.
그러나 비원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1903년에 창덕궁 후원을 관장하는 기구로서 비원을 두었을 뿐이다. 따라서 일제가 비원이라는 용어를 널리 쓰도록 한 것은 한 나라의 궁궐로서 위엄있는 곳이 아니고 단지 놀면서 누구나가 즐겨 찾는 놀이공원으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창덕궁 후원으로 불러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