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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국가 사당이다. 종묘란 본래 정전을 말하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신위가 제일 첫 번째에 있기 때문에 태묘라고도 한다. 우리의 종묘제도는 삼국시대로부터 계속되었다. 조선시대의 종묘는 주례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제례를 거행하는 과정이나 신위를 모시는 형태와 건물의 구조는 중국의 종묘와 전혀 다르다.
전근대사회에서 종묘와 사직은 국가의 존폐와 비견될 정도로 중요시 되었다. 종묘는 통치자의 조상을 모시는 곳이고, 사직단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의 신과 토지의 신을 모시는 곳으로서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을 두는 좌묘우사의 형식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종묘와 사직이 경복궁을 중심으로 사직은 왼쪽에 종묘는 오른쪽에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종묘의 건물을 처음 지을 때는 7간으로 하여 5실에 각각 신주를 모셨다. 기본적으로 5묘제를 택하면서 태조의 신주를 제외하고는 4대조를 봉안하였다. 그 후 왕위가 계속 이어져 나가면서 점차 신주를 모실 건물이 부족하게 되자 정전 옆에 영녕전을 짓고 이곳에 4대조가 지나면 신주를 옮기도록 하는 조천(祧遷)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비록 4대조라 하더라도 치적이 큰 왕은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정전에 모셨다. 예를 들면 태조를 비롯하여 태종 세종 세조 등은 정전에 모셔져 있지만 재위기간이 짧거나 치적이
없는 정종 문종 단종 예종 등은 영녕전으로 신위를 옮겨 모셨다.
그 순서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신실이 이어져 가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현재는 정전에 19위 왕과 30위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영녕전에는 제일 중앙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모시고 15위 왕과 17위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의 신주를 16실에 모셔놓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계속 늘어나는 신위를 봉정할 장소가 모자라 기존의 정전에 옆으로 계속 건물을 신축하여 늘려 나갔다. 임진왜란 때 불탄 종묘를 1608년에 전체 11칸의 건물로 옛모습 그대로 복구하고, 영조 때 4칸을 증축하였으며, 다시 헌종 때 4칸을 증축하여 모두 19칸의 현재 건물이 되었다. 이와 함께 영녕전의 건물도 계속 증축하여 1836년(헌종 2)에 모두 16칸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서 지어진 자연친화적 건물이라는 점과 동아시아의 종묘제도에 따른 건축이 아닌 조선의 독창적 요소가 드러나 있다는 점, 종묘제례와 제례악이 600여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