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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학개론

한국탈춤의 역사

biumgonggan 2016. 12. 7. 22:55

원래 탈춤은 인류역사와 함께 발생한 원시종합예술 중에서 특히 탈 분장에의한 종교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탈춤은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가리비탈」을 부산 영도 동삼패총에서 발굴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문헌 기록에서도 발견되는바, 삼국시대
에는 고구려의 「고구려악」과 백제의 「기악(伎樂)」, 그리고 신라의 「황창무(黃倡舞,劍舞)」, 「처용무」, 「상염무(霜髥舞)」, 「오기(五伎)」 등 탈춤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들을 추념하는 「추모탈춤」이 등장하였고, 후기에는 시류풍자적인 「사회참여탈춤」이 나타났다. 조선시대의 산대도감놀이는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산희(山戱)를 인형극,야희(野戱)를 탈춤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후로는 쇠퇴에 접어 들어 인조 이후는 나래 규모도 작아지고, 청나라사신 영접시의 산대 잡희도 열기가 식었으며, 영조조 이후는 결국 페지되고 말았다. 이후로 산대도감의 창우(倡優), 광대들이 각기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본래 지방에서 전승되던 탈춤과 습합되어 산대도감 계통의 민속 탈춤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의 임진, 병자 양란으로 조선조의 사회구조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즉 양반의 위세가 떨어지고 서민들의 민중의식이 높아졌으며 근대상업도시의 발흥으로 서민층의 거부거상이 나타나 상역지를 중심으로 각종 민속연희를 비롯하여 탈춤 등이 그 경제력에 힘입어 급성장하게 되었으며 직업탈춤패까지 생겨나는 「도시형 탈춤」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산대도감(山臺都監)이 정파(停罷)(인조 12년)된 후로는 예속됐던 재인, 광대들이 도시형탈춤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산대도감놀이」에서 오늘날 전승되는 「산대놀이」로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산대(山臺)」라는 명칭은 일명 「채산(彩山)」,「채붕(綵棚)」이라는 가설무대로서 주로 궁중에 설치하였으며, 거기서 가무백희를 연행하였고, 신라 진흥왕 이래 팔관회와 고려시대의 연등회에서도 연희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산대」는 「산과 같이 큰 무대」,「비단으로 장식된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