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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학개론

백제 건국과 성장

biumgonggan 2016. 11. 13. 09:00

백제 건국과 성장


삼한시대에 지금의 송파구 풍납동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3겹의 환호(環濠)로 둘러싼 큰 마을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안가 그 바깥에 더큰 성벽을 쌓았다. 어느덧 큰 나라를 이룬 것이다. 나라 이름은 백제(百濟)이다. 백제의 대표 유적으로는 송파구의 풍납토성・몽촌토성과 석촌동고분군이 손꼽힌다. 특히 지금의 풍납토성은 백제의 초기 수도인하남위례성을 고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석촌동고분군은 백제의 왕과 귀족 등 지배층이 많이 묻힌 일종의 국립묘지이다.백제 왕족과 귀족에는 부여・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증거는 여러 가지이다. ① 건국설화에서 백제시조 온조왕은 고구려시조 주몽의 아들이다. ② 서기 472년,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北魏)로 보낸 편지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썼다. ③삼국유사에는 백제왕실이 부여에서 나왔으며 성씨도 부여처럼 해(解)씨였다는 기록이 있다. ④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扶餘)씨이다.⑤ 서기 538년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 ⑥ 백제 위덕왕이 스스로 고구려와 성씨가 같다고 말했다. ⑦ 중국 역사서에는 백제의 언어・복장이 고구려와 같다고 적혀있다. ⑧ 백제의 왕실무덤도 고구려와 같은 돌무지무덤이다.

그러면 백제는 언제 세워졌을까? 삼국사기에는 서기전(BCE) 18년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석촌동・가락동일대에 분포하던 움무덤[土壙墓]과 돌무지무덤은 대개 서기 2・3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은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마침 중국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에 마한(馬6 2014년 제1기 서울 이해과정韓)이 50여개의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졌으며 그중 하나가 백제국(伯濟國)이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국이 커져서 백제(百濟)로 변했을 터이므로, 3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는 여전히 소규모의 성읍국가 단계였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가 실제로 건국된 것은 2세기 무렵이지 않을까?한강유역에서 국가 형성과 성장이 늦어진 것은 북쪽의 낙랑군과 대방군이 끊임없이 견제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기전 108년에 설치된 낙랑군은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한때 25개 현(縣)을 거느렸던 큰 군(郡)인데, 주변의 토착세력에게 중국 벼슬 및 의복・장식품 등을 나눠줌으로써 중국적 세계질서를 확산시켰으며, 저항세력은 가차 없이 공격하였다. 서기 204년경 황해도지역에 새로이 설치된 대방군도 크게 다르지않았다. 그러므로 이들 한군현과 가까운 한강유역은 강한 견제를 받았으며, 초기 백제는 중국의 거대한 힘과 문화에 눌려 여러모로 열세를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백제의 도전이 거세졌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고이왕(234∼286)은 낙랑군이 고구려와 싸우는 사이에 낙랑군의 변경지역에 사는 주민을 잡아왔다가 돌려준 적이 있으며, 책계왕(286∼298)은 전투 중에 사망하였고, 분서왕(298∼304)은 낙랑의 서쪽지역을 공격하여 빼앗은 일 때문에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낙랑군이 자객을 이용해 백제에 보복하였다는 것은 예전처럼 직접 전쟁을 통해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백제가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서기 313년경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이 멸망하고 곧이어 대방군마저사라지자 백제의 성장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강력한 견제세력이 사라졌기 때문이지만, 그 못지않게 국가 경영에 필요한 인력을 흡수할 수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중국 역사서 수서(隋書)에는 “백제인의 출신이 잡다하여 신라・고구려・왜(倭)・중국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산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의 중국인에는 아마도 낙랑・대방군 출신이 많았을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낙랑・대방지역 소유권을 다투었다. 근초고왕 24년(369),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 배천지역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이끌던 2만명의 군대와 치열히 다툰 끝에 5천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유역이 배타적 안전지대임을 확인하는 한편, 황해도지역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근초고왕 26년(371), 백제는 마침내 3만 대군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전투는 고국원왕을 죽이고 물러나는 선에서 정리되었지만,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군사적 우위를 분명히 과시하였다.


백제의 군사 우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세기 말엽, 백제는 고구려의 광개토왕(391∼412)이 이끄는 군대에게 연거푸 크게 지며 북방의많은 영토를 잃고 말았다. 이에 백제는 군사원조를 얻기 위해 서기 397년 태자 전지(腆支)를 왜(倭)에 인질로 보내는 등 절치부심하였으며,국력 배양을 위해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외교 폭을 꾸준히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5세기 후반 개로왕(455∼475) 때에 이르면 더 강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된다.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군사 3만명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켰다. 당시 한성은 북성과 남성2개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를 차례로 빼앗고 개로왕과 그의가족을 잡아 죽였다.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침입하자 왕자인 문주가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다가 돌아오던 중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고 한다. 백제가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한성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한성 포기는 한강유역 상실을 의미한다.지금의 서울을 손에 넣은 고구려는 단숨에 한강유역 전체를 정복하였다. 충북 충주에서 발견된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는 5세기말경 고구려가 소백산맥 일대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한강유역 전체를 행정구역으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어떻게 통치하였는지에 2014년 제1기 서울 이해과정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서울지역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남쪽의 제2 수도라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