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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갈비와 왕십리곱창의 유래는 여기에서부터!
조선시대 정육점 다림방
정육점이 없던 시절에는 가축고기를 어떻게 구해먹었을까요?
고기가 필요할 때마다 소나 돼지를 잡는다고 생각하기는 쉽지만, 한 끼 식사에 필요한 양을 얻기 위해 끼니때마다 한마리씩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왕이나 상류층 귀족들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식문화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겠죠. 서민들이 고기를 쉽게 구해 먹게 된 것은 짐승을 도축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해주는 중간 상인들의 등장과 함께 가능해졌습니다.
조선시대 또한 이 같은 중간 상인이 필요했는데요, 이때문에 한양에서 쇠고기를 독점 판매하는 다림방의 출연은 필연적이었던 것입니다. 원래는 성균관이 문묘 제사에 바칠 희생용 고기 마련을 위해 설치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균관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성균관의 노복들이 쇠고기를 독점적으로 확보하여 상인과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 육류 판매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처음에 다림방은 성균관 노복들이 사는 반촌 근처인 동소문 성균관 관동, 현재의 성균관대학교 인근에 위치하였습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육류소비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면서 다림방의 수요는 크게 늘어나게됩니다. 양반층을 비롯해 중인층을 중심으로 육류소비가 크게 늘어나고, 소 도살 엄금정책이 완화되면서 양반과 중인들이 사는 북부, 중부지역뿐아니라, 동부의 이교(현재 동대문 근처), 광례교(현재의 명륜동 근처), 남부의 광통교(현재의 종각근처), 저동, 호현동(현재의 회현동 인근), 의금부 근처, 서부의 육조거리 등지에까지 다림방이 설치된 것입니다.
이는 조선의 생활수준 전체가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일부 소수의 귀족들만이 향유했던 육류소비를 일반 시민들까지 즐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성 밖 왕십리, 소의문 밖, 마포 등지에도 다림방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도 육류 식문화가 일반 백성 사이에 폭넓게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이후에도 종각의 피맛골, 왕십리의 곱창, 마포의 갈비 등 다양한 고깃집과 음식점으로 이어지면서 서민들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공급하는 중심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