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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인 숙정문. 숙정문 밖에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때는 15세기 중반. 숙정문 밖 산골 마을에 효심 깊은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논밭 한 뙈기 가진 것 없는 집안 형편에 장가도 들지 못한 젊은 나무꾼은, 숙정문 밖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내다 파는 것으로 노부모를 부양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어느 봄날, 여느 때처럼 젊은이는 하루의 결실인 나무덩이를 짊어지고 숙정문으로 향했다. 아침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기에, 젊은이는 현기증까지 느껴가며 오르막을 올랐다. 그런데 겨우 숙정문에 이르자, 문이 또 닫혀 있던 것이다. 망연자실한 나무꾼은 다리가 풀려, 길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 옆에 잠시 몸을 쉬었다. 그러다 어느새,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에 젊은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로 자신이 기대어 잠이 들었던 바위에서 하얀 쌀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나무꾼은 재빨리 자신의 머리에 둘렀던 땀수건을 펴들고 흘러내리는 쌀을 받았다.
한 됫박쯤 되는 쌀을 보자, 젊은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만큼의 쌀이면 노부모님께 맛있는 쌀밥을 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게를 짊어진 줄도 모른 채, 한달음에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쌀밥을 지어 부모님 앞에 올렸다. 굶주렸던 노부모는 역시 맛있게 먹었고, 젊은이는 무척 흡족했다.
다시 저녁때가 다가오고, 젊은이는 또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어 그 바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위에서 다시 쌀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무꾼은 날마다 흘러내리는 한 됫박씩의 쌀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나무를 하러 다니지 않았다. 그토록 성실했던 젊은이는, 이제 쌀바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석 달여의 세월이 흐르자, 그마저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커다란 쌀자루에 쌀을 가득 채울 계획을 세웠다. 집안사람들 모두가 오래도록 넉넉히 먹을 만큼 채워서 오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는 팔아볼까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는 바위 밑에 커다란 쌀자루를 두고 기다렸다. 하지만 쌀은 여전히 아침, 점심, 저녁때에 맞춰 한 됫박씩밖에 흘러내리지 않았다.
탐욕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만드는 법. 그렇게 며칠을 기다려 커다란 자루 하나가 겨우 찼을 때, 흘러내리던 쌀이 별안간 그쳐버렸다. 그때서야 젊은이는 번쩍, 정신이 들고 만다. 욕심에 눈이 멀어, 집에 계신 노부모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보지만, 굶주림으로 탈진한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효심 깊었던 젊은이의 욕심이 결국 부모님을 굶주려 죽게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이 쌀바위에서, 다시는 쌀이 흘러내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종로구 삼청동의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숙청문(肅淸門)은 어느 때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종실록』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풍수설과 음양오행설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줄곧 닫아두었던 숙정문.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는 북문, 즉 숙청문을 열고 남문, 즉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 때 양을 억누르고 음을 부추겨야 비가 온다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숙정문에 이르는 이 전설은, 마음이 가물기 전까지는 ‘음’을 다스려, 욕망을 잘 열지 말고 줄곧 닫아두라는 교훈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