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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공업단지 조성 이후 한국산업화의 중심지이자 노동민주화의 출발지였던 구로공단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에는 약 11만명이 이곳에 종사하게 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재벌들이 주도하는 중공업 산업단지로 변경되었습니다.1985년 당시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주로 젊은 여성이었던 당시 노동자들 그 당시 근무환경을 어땠을까용?

1970년대 중후반 구로공단 여공들은 대개 아침 8시부터 밤10시까지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일부 악덕 업주들은 잠 안 오는 약까지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임금체계는 열악해 돈도차 모을 수 없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여공이 퇴근하려면 꼭 '센터'라는 몸수색을 받아야 공장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여성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리자가 상의에서 하의까지 손으로 전부 더듬어 숨긴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센터 깐다"는 비속어는 여기서 나왔다고도 합니다.

산업구조가 변하자 입주기업들이 하나둘씩 줄어갔습니다.

2000년대 들어 정부주도로 IT첨단산업단지로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이름도 서울디지털단지로 변경되었습니다. 구로동맹파업의 시발점인 대우어패럴 자리에는 오렌지아울렛 등 패션타운이 조성되었고

서울시 등이 지원하는 각종 혜택으로인해 제조업, 정보기술업, 물류업 등 중소기업의 아파트형 공장들도 들어섰습니다. 여전히 비정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첨단 디지털시대의 개막에 맞춰 '구로디지털단지'로 이름도 바뀐 지금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는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이 있습니다. 그곳엔 지난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고단했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좁은 집에서 여럿이 모여살며 공동세면장과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며 그들이 살던 방을 '희망의 방' 이라고 불렀던 소녀들.... 산업화를 위해 젊음을 바쳤던, 수많은 여공들의 꽃다운 청춘이 담겨져 있기에 더욱 가치있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