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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많이 흘러도 명동은 명동이다. 명동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현재 트렌드를 가장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서울에 오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명동일 정도로 명동은 관광 명소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현재의 명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한다. 주택가였던 명동에 일본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변화하게 된다. 백화점, 극장, 금융기관들이 명동에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명동은 점점 번화가가 된다. 1930년대 명동은 그야 말로 다방의 전성기였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예술가들이 명동의 극장으로 속속 모여들어 그들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이상이 만들었다는 ‘무기’라는 다방이 생겼다. 당시 전혜린, 이중섭, 이상, 등 30년대를 대표하는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친분을 나누는 곳이었다.
1934년 일본의 다마다 건축사무소에서 명동 한 복판에 명치좌라는 이름의 일본인 전용 극장을 세운다. 명치좌는 한국에 들어선 최초의 현대식 극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명치좌는 일본인들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졌고, 영화 상영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명치좌가 바로 지금도 명동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하고 있는 명동 예술극장의 전신이라고 한다. 해방이후, 이 공간은 서울시의 시 공관으로 각종 공연과 정치 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명동 예술극장은 중앙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근대의 문화 예술과 언제나 함께했다. 한국 오페라의 대모 김자경이 주연한 베르디 오페라 춘희의 초연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이해랑이 연출하고 최무룡 주연의 햄릿이 최초로 선보인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이렇게 다시 명동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명동 주변의 다방과 주점에는 토론을 벌이는 예술가들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명동 다방에는 시인과 연극계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연극하는 사람들은 동방쌀롱으로 시인들은 천동다방으로 모였다고 한다.
국립극장은 현재 장충동으로 옮겨갔고, 명동 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이 남아있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 명동 예술극장에, 질 높은 연극 공연이 항상 올라와 관객들을 맞이한다. 세월의 흐름 따라 변화하는 명동에 좋은 연극 공연 한 편 보러 가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