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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주름>에서도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좀 더 파격적이고 에로틱하며 탐미적일 뿐이지요. 대기업 CFO였던 주인공 김진영은 유정의 최석과 마찬가지로 중년의 나이에 뒤늦게 가정과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내가 50대가 됐을 때 솔직히 말해 나는 인생의 본문을 다 써 버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가족들은 나를 다만 돈 버는 사물처럼 취급했고, 또 그렇게 살아온 것 또한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변화할 생각이었다.'라고 말하는데요. 어느 비 오는 날 우연히 만난 연상의 여류시인 천혜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그녀를 위해 회사의 공금을 횡령하고 결국 말없이 떠난 그녀를 찾아 아프리카, 스코틀랜드, 카프카즈산맥, 타클라마칸 사막, 텐산산맥,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베리아의 바이칼로 갑니다. 이미 불치병에 걸린 천혜린은 '자신을 태워 바이칼 알혼섬 북단의 들꽃들 위로 유골을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고 그녀를 따라 진영도 바이칼에서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하지요. 최석과 남정임, 김진영과 천혜린. 이들은 모두 위선과 허상에 갇힌 사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인데요. 이들에게 바이칼 호수는 그들이 잃어버린 근원적인 무엇, 바로 애초에 텅 비어 있던 중심, 언젠가는 죽음으로써 돌아가야 할 탄생의 심연, 자궁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닌 것이지요. 박범신은 김진영의 여행을'생의 중심이라 할 죽음에의 북진', '사멸의 북행길로 우리를 몰고 와마침내 북극해 밑 500여 미터, 절대고독의 그 심연으로 우리를 밀어 넣고 만다'라고 묘사하는데요. 마지막에 그 바이칼 호수의 심연에서 주인공은 '죽지 않는 나라가 꿈 같이 펼쳐져 있다'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바이칼을 찾은 아들은 '죽음을 향해 부나비같이 뛰어드는 나의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라고 말하고 유정의 최석은 바이칼이야말로 '내가 평소에 이상하게도 그리워하던 곳'이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바이칼은 한국 작가들에게 연어가 죽기 전에 다시 찾아가 생의 마지막 욕망을 불태우고 장렬히 죽어가는 본향이었던 셈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