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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제도, 관념, 관행들을 가지고 과거를 바라보곤 합니다. 조선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민족국가라는 창을 통해 이해하거나, 신라의 대당 항쟁을 역시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의식의 발로로 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민족의식처럼 익숙한 것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면면히 내려왔을 거라고 당연하게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 중에는 아주 최근에서야 나타난 것들도 많습니다. 그 이전의 과거는 현대인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것들로 가득했던 거죠. 이 처음의 역사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 익숙한 것들과 낯선 것들이 분기하기 시작하는 지점으로 올라가 볼 것입니다. 그 지점에 서면,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던 현대의 제도, 관념, 관행들을 비로소 달리 볼 수 있게 됩니다. 달리 본다는 것은 비판과 혁신적 사고의 시작일 것입니다.
오늘은 최초의 자본에 대해 포스팅해보겠습니다. Capital의 동양권 언어 번역어인 자본은 사전에서는 단순히 ‘많은 돈’입니다. 자본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많은 돈’ 또는 이를 가진 거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거라 추정하게 될 것입니다. 진시황제가 천하의 부자 12만 명을 함양으로 이주시켰다는 일화를 기억하며, 최초 자본의 존재를 기원전 이상으로 올리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통 시대 부자들이 가진 ‘많은 돈’은 사회과학적 의미의 자본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많은 돈이 아니라 더 큰 이윤 추구를 위해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투자되는 많은 돈을 말합니다. 이런 자본은 언제 최초로 출현했을까요? 그 답을 드리기에 앞서, 우선 전통 시대의 부와 자본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전통 시대의 부는, 대체로 안정적 수입원을 바탕으로 축적됩니다. 지대가 나오는 토지, 또는 일정 수입을 보장하는 고정 거래처나 교역루트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상공업자들이 국가에게서 획득한 납품권도 있겠네요. 이렇게 번 ‘많은 돈’을 전통 시대 부호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할 것 같은 방식으로 소비했습니다. 의식주 수준을 높이거나, 유흥을 위해, 또는 보다 도덕적으로 긍휼 등에 쓰기도 했습니다. 물론, 안정적 수입원을 정치적, 물리적으로 지키기 위한 비용에도 많은 양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목 좋은 교역루트는 항상 라이벌이나 비적들의 표적이 될 것이기에 그 방비를 위해 군비를 지출해야 했으며, 국가에 납품하는 업자의 경우에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로비자금을 써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은 이 모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부의 부분이 그냥 쓰이지 않고 창고나 금고에 보관되었다는 점입니다. 부호들은 일부는 현물 그대로, 일부는 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바꾸어 이를 간직했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곤경에 대비한 안전 책이기도 했지만, 남에게 그들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업적을 눈으로 매일 확인하며 흐뭇해지는 유흥 거리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전통 시대 부호들은 현대인과는 달리 곳간에 쌓인 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마음의 안정감, 자부심, 그리고 기쁨을 누리는 것에서 중요한 가치를 찾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돈은 그 규모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투자처를 따라 요동치는, 따라서 소유자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지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하지만 그 대비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있는 ‘자본’과는 다른 것이죠. 자본은 은행 잔고 등에 숫자로 표시되는 것 이외에는 가시적으로 보이지도 않죠. 이런 자본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과거, 즉 15세기경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에서 출현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의 이른바 4대 도시 등이 크게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정치 단위 간 전쟁, 특히 당시 막 출현하던 영토 국가들이 연루된 전쟁이 끊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 빈번한 전쟁 속에서 개별 정치 단위들은 군비 조달을 위한 빠른 자금줄이 필요했지요. 이는 여유 자금이 있던 당시 이탈리아의 대상인들에게는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격변기에 대출이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안정성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많은 부호들은 이에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안정적인 수입원들이 이 정치적 격변에 매우 취약함을 곧 깨닫게 됩니다. 메디치 가문으로 대표되는 피렌체는 백년전쟁으로 플랑드르의 양모 제조업과 같은 기존 수입원이 침해받는 모습을, 제노바는 오랫동안 의지했던 중앙아시아 교역로의 안정성이 몽골제국의 쇠퇴로 크게 감소하는 모습을 목격하죠. 이에 피렌체와 제노바가 내린 결론은 그들 부의 유동성을 늘림으로써, 이와 같은 정치적 격변에 대해 순발력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동성 강화 방법으로 이들은 과거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여태 본격적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던 은행 기술들, 특히 수표와 환어음 적극적 발행, 지불 방법으로서의 은행 이체 확대, 신용 확장과 결제 지연 등을 활용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이른바 고도 금융 체제의 등장이었습니다. 이 체제에서 부호들은 자산을 눈앞에서 즐길 수는 없게 되었지만, 계좌에서 급격히 불어나는 자본의 맛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특정 산업의 수익성이 좋아 보이면 그곳에 투자했다가 상황이 바뀔 경우 재빨리 돈을 거두어 다른 곳에 투자하는 전략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리고 그 투자처 또한 산업을 넘어 환거래나 국가 재정 개입 등 보다 위험하지만 더 큰 수익이 날 수 있는 곳들로 다양화되죠. 명실상부한 자본이 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모든 유럽의 거부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었습니다. 15세기 이탈리아 상인들이 주도했던 이 같은 의식 전환은 17-8세기 네덜란드 사업가들과 19세기 런던 금융가들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19세기 전반까지도 유럽 사회를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중엽, 역사가 홉스봄이 ‘자본의 시대’라 지칭했던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부를 유동시키면서 더 큰 이익을 추구한다는 관념이 유럽인들에게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리고 그 관념의 보편화와 함께 자본주의가 경제 체제의 대세로 등장하게 되죠. 최초의 자본은 15세기에나 출현했고, 그 결실인 자본주의 체제는 19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이윤 창출을 위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자극하는 관념 또는 체제는 인류 역사와 줄곧 함께한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네요. 자본과 자본주의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서 출현해 특정 기간 동안에만 힘을 발휘했던 인류가 부를 바라보는 방식 중 하나에 불과했던 거죠. 이제 자본과 자본주의를 그 전과 다르게 보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