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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독일 기업 '보쉬' 많이 들어보셨죠? 보쉬 하면 어떤 기업이란 생각이 드십니까? 자동차 부품 기업? 공장기기 생산 기업? 세탁기 제조 기업? 다 맞습니다. 직원 수 40만 명, 연매출 100조 원에 달하는 보쉬는 이 사업분야를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지요. 보쉬는 1886년 설립 이래 지금까지 독일 간판기업으로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비결은 단연 기술력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자체 기술이죠. 보쉬는 '기술은 무조건 자체 기술', 즉 자신들 힘으로 개발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매우 보수적인 기업인데요, 그래서 100년 넘게 인수합병도 거의 없었습니다. 필요한 분야가 있으면 직접 만들고 개발해서 사업을 키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보쉬에서 최근 5년간 인수와 매각이 50건 이상 이뤄지고 있는데요, 보수 기업 대명사 보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이유가 뭘까요?

 

보쉬는 195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의 기계 제조 기술에 전자 기술을 접목한 '메카트로닉스' 혁신을 추진했습니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메카트로닉스는 당시에는 매우 낯선 시도였죠. 보쉬는 선제적인 전자·기계 기술을 자체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매출의 10%가량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며 다른 업체들과 기술 차별화를 지속했습니다. 차세대 제품을 순차적으로 끊임없이 출시하는 동시에, 과거 기술들은 후발업체에게 라이선스를 판매하는 사업모델로 고수익을 창출했죠. 이제는 자동차에 보편적으로 장착되고 있는 ABS 시스템이나 ESP 시스템 등은 바로 이런 보쉬의 대표적 제품들입니다.

 

하지만 최근 자동차, 공장, 빌딩 등에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새로운 IT 기술이 접목되면서 부품시장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요. 즉, 시장은 과거 보쉬의 강점인 HW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SW 역량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100년을 이어온 장수기업 보쉬에게 역사상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방식대로 모든 기술을 직접 개발하며 폐쇄적 성장을 이어갈 것인가', '외부 협력을 추구하는 개방적 성장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겁니다. 보쉬는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쉽게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개방적 성장'으로 과감히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자사의 HW에 외부의 SW 기술을 가져와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제품 혁신을 추구하며 빠르고 유연하게 시장에 대응했습니다. 과거에는 사업 인수나 매각의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보쉬가, 최근 5년간 50건 이상 인수와 매각에 나선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보쉬는 전기차 시대에 맞춰 필요 없는 기존 내연기관차의 부품 사업들을 중국에 매각하는 등 사업 포트폴리오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는데요. 한때 성장 원동력이었지만 사업성이 떨어진 태양광, 풍력발전 기어, 시동모터, 발전기, 터보차저 등의 사업을 2014년부터 순차적으로 매각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업 건전성을 향상할 수 있었죠. 그런데 이건 단순히 재무건전성 개선을 위한 매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 사업을 매각함과 동시에 향후 필요한 분야의 사업을 발 빠르게 인수했는데요, 전기모터 업체 EM-motive, 가전업체 BSH 등의 인수가 모두 최근 5년 사이에 이뤄졌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비즈니스 설루션 개발업체 이너비트, 공유차 플랫폼 업체 스플리팅 페어즈, 차량용 서비스 업체 ITK Engineering, 통신 설루션 업체 프로 시스트 등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연이어 인수한 건데요, 이를 통해 보쉬는 보쉬 소프트웨어 이노베이션이라는 소프트웨어 하우스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개방적 성장을 추진한다고 기존의 자체 기술 전략을 폐기한 건 아닙니다. 보쉬는 SW 자체 기술 역량을 높이기 위해 최근 3년간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등 소프트웨어 인력을 두 배 가량 빠르게 확충했는데요, 현재 그 수만 3만 명에 달합니다. 독일 레닝엔의 인공지능 센터에 100여 명, 베를린의 IoT 캠퍼스에 250여 명의 최고 전문가들도 배치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2018년에는 차량 데이터를 활용한 서비스 사업을 위해 Connected Mobility 사업팀도 신설했습니다. 보쉬는 사물인터넷 기반 자율주행 셔틀과 함께 부품·시스템, 예약·공유, 커넥티비티 플랫폼, 주차, 충전 서비스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함께 제공한다는 계획입니다.

 

더불어, 현재 200여 개의 자체 사물인터넷 프로젝트도 운영 중인데요. 공기 모니터링, 무인주차, 과일·채소 재배 센서, 센서 보조 가축농장, 커넥티드 스쿠터·자전거 등 운송에서부터 스마트 도시, 소비자 부문에 이르는 다양한 수직 부문에 사물인터넷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향후에는 이러한 각각의 수직 부문에 대한 교차 사물인터넷 생태계 구축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시장의 빠른 변화 속에서 많은 기업들이 합종연횡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보쉬의 변화가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100년 이상 외부와의 협력 없이 자체적으로 성공적인 혁신을 이어가던 기업이 기존의 틀을 깬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폴크마 덴너 보쉬 회장은 "다른 사람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스스로 약점을 찾아내며 자체 기술력을 높여왔던 것처럼, 폐쇄적 정책이 약점일 수 있음을 스스로 찾아내고 개방적 성장으로 전환한 보쉬의 변신을 뒷받침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보쉬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방식에 매몰돼 진정한 변화를 주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